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세대의 사람들을 비판하십니다.
당대의 사람들이 요한도 비난하고 당신도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비판은 당신을 비난하신 것에 대한 악감정 때문입니까?
주님은 당신을 비난한다고 비판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의 비판은 악감정, 다시 말해서 분노에서 비롯된 비판이 아니라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이라고 말씀하시는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아쉬움과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비판입니다.
분노는 자기중심에서 비롯된 나쁜 감정이지만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사랑의 감정이지요.
잘 되기를 바라지만 그리 되지 않을 때 생기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철부지 아이들 얘기를 주님께서도 하시듯
당대의 사람들은 철부지 아이들처럼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장단에 남들이 다 춤을 추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자기 장단에 맞춰 춤추기를 거부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 장단에 맞춰 춤추지 않는다고 비난을 할 텐데
그래서 요한은 먹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먹는다고 비난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요한도 주님도 사람들의 장단에 춤추는 분들이 아닙니다.
두 분은 하느님의 장단에 춤추지 사람들의 장단에 춤추는 분이 아니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장단이란 뭣입니까? 사랑의 장단이 아닙니까?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단식의 사랑을 하였고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 어울려 먹는 사랑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장)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12장)
그러니까 장단은 사랑이고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을 위한 사랑의 장단이 아니면 결코 춤을 추지 않고,
반대로 구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요구라도 맞춰 춤춥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짜 철부지 어린이가 아니라
나이를 먹을 대로 먹고서 철부지인 사람인데
철부지의 문제 중 하나가 자기중심성이라면
다른 하나는 지혜와 분별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와 분별력이 떨어질 때
자기의 처지가 지금은 다소곳이 얘기를 들어야 함에도
천지분간을 못하고 자기가 마구 떠들어대서는 안 되겠지요.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지혜로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진정 천지분간天地分揀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소리와 세상의 소리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하고,
하늘의 소리를 들을 때와 나의 소리를 아뢸 때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하지요.
이 말은 순종의 때와 청원의 때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인데
우리의 지혜로운 기도는 바로 이것을 잘 분간하여 하는 기도이지요.
막 돼 먹은 자식이 부모의 말은 듣지 않고 그저 요구만 하듯
지혜롭지 못한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먼저 듣겠다고 하지 않고
그저 하느님께 달라는 기도만 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불평과 원망만 합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말씀대로 했으면 오늘 이사야 말씀처럼
모든 것이 잘 되고 평화가 넘칠 텐데 자기 좋을 대로 하고 난 뒤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탓을 하느님께 돌리고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