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오늘은 토마스 사도의 축일입니다.
토마스 사도하면 불신의 사도 또는 의심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신과 의심이 믿지 않거나 못한다는 면에서 같지만
불신이 사람이나 하느님의 전부를 믿지 못하는 것인데 비해
의심은 사람이나 하느님의 어떤 면, 일부를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반신반의라는 말처럼 대체로 믿지만 어떤 면은 의심이 가는 식이지요.
그래서 저는 토마스 사도를 불신의 사도라기보다는
의심의 사도라고 함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의심도 나쁜 의미의 의심보다는 좋은 뜻의 의심으로 보고 싶습니다.
나쁜 뜻의 의심과 좋은 뜻의 의심이라고요?
나쁜 의심도 있고 좋은 의심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나쁜 의심도 있고 좋은 의심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처증과 같은 병적인 의심이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나쁜 의심들이 있습니다.
의심으로 끝나고 관계를 망가트리는 의심이며,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래서 남은 물론
자신도 불행과 파멸로 몰아넣는 의심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의심은 어떤 것입니까?
의심을 덮지 않고 끝까지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끝이란 ‘믿을 수 있을 때까지’이지요.
사실 믿지 않으려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지 않으려거든 굳이 의심할 필요 없이 그냥 믿지 않으면 되지요.
예를 들어서 제가 ‘죽으면 산다.’고 말을 하면
믿지 않을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며 묵살해버리겠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거짓인지 참인지 알고픈 사람은
제가 한 말을 붙잡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할 텐데 이게 의심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의심에 의심을 거듭할 때 이 말을 깨닫게 되고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번 진짜 죽어보면
이것은 더 큰 의심이 되기에 더 확고하게 깨닫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의심이 깨달음을 얻게 하기에 큰 의심이라고 하고
큰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더 큰 의심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화두를 붙잡고 궁구한다는 것이 다 이런 뜻입니다.
고등학교 때 저는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신 국어선생님으로부터
역시 재속 프란치스코회원인 체스터톤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체스터톤은 1874-1936 사이에 사신 분으로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작가였고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도 쓰신 분이지요.
이 체스터톤이 하느님 존재를 의심하여 러시안룰렛을 한 겁니다.
곧 실탄 여섯 발이 들어가는 권총에 다섯 발을 채우고
다시 말해서 한 발만 비우고 머리에 대고 권총을 쏴서
죽지 않으면 하느님이 계시고 죽으면 하느님도 자기도 없는 거라는
생각으로 실행했는데 죽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하느님 체험을 했다지요.
이 얘기를 듣고 하느님 존재를 의심하던 저도 삶과 죽음을 걸고
하느님 존재를 시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연탄 연기를 마시고 죽을뻔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한 번으로 하느님 체험을 하지 못했지만 10년 넘는 의심 끝에
그리고 큰 좌절과 절망의 인생 체험 끝에 하느님 체험을 하고
의심을 끝내게 되었고 믿게 되었지요.
그러므로 토마스 사도는 큰 의심을 한 분으로서
우리에게 큰 믿음의 모범이 되어야 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