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최후만찬을 하시는 중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말이 자기를 두고 한 말씀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이구동성으로 여쭙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다 이스카리옷도 주님께 여쭙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정말 이렇게 여쭈었는지 모르지만
유다 이스카리옷과 다른 제자들 사이에 예수님께 대한 호칭이 다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스승님”이라고 부르는데 비해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의 어떤 의도가 느껴집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주님이었지만
유다 이스카리옷에게만은 스승 정도였다는 뜻이겠지요.
너희 중 하나가 당신을 팔아넘길 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다른 제자들은 근심을 하며 자기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모두들 배신을 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은 제자는 없고,
요한복음에서만 주님의 사랑 받던 제자만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 모두 배신을 했지만
주님이라고 생각한 다른 제자는 주님을 두고 도망은 쳤어도
주님을 팔아넘기지는 않았고,
스승이라고 생각한 유다 이스카리옷은 주님을 팔아넘겼으며,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어도 뉘우치고 다시 돌아와 순교했지만
유다 이스카리옷은 영영 뉘우치지 못하고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후회는 했어도 회개는 하지 못했고
하여 자기의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겁니다.
이것이 마태오복음이 말하고자하는 두 관계의 차이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른 제자들은 배신은 했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승이라고 부른 유다는 예수님을 그저
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기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우리도 예수를 스승, 곧 한 인간 정도로만 믿으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나 실패를 했을 때 절망을 할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인간만 보고 하느님을 보는데 실패하면
죄와 실패로부터 자기를 구해줄 분이 안 계시기에 절망하고
용서해주실 분이 안 계시기에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안에 있으면
하느님 안에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지금의 나 비록 죄가 크고 다시 일어설 힘이 없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일으켜주시고 이끌어주시리라는 희망이 있고,
그래서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 이런 뜻으로
예수님을 스승이 아니라
“주님!”이라고 한 번 불러봅시다.
이 나악함을 주님께 봉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