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4,42-51
오늘 복음의 열쇳말은 ‘깨어 있어라’입니다.
그리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모습은
‘제때에 양식을 내주며’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입니다.
반대로 ‘못된 종’은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며 ‘깨어 있기를 포기한’ 종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끝까지 깨어 기다림’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녀 모니카가
바로 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살아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아들 아우구스티노를 위해
수십 년을 ‘깨어’ 기도했습니다.
아들이 이단에 빠지고 방황하는 긴 세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이제 너무 늦었구나, 포기하자’ 하지 않았습니다.
못된 종이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며 손을 놓았다면,
모니카는 ‘늦어도 반드시 오신다’ 믿으며 깨어 있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러한 ‘깨어 있음’이 곧 ‘사랑’이라고 봅니다.
사랑하기에 깨어 있고,
사랑하기에 ‘제때에 양식을 내주듯’ 돌봅니다.
(크리소스토모 자신도 안투사라는 신심 깊은 어머니의
기도 속에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모니카의 ‘깨어 있음’은
아들을 위해 ‘눈물의 양식’을 끊임없이 내준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 있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암브로시오의 말 그대로,
아우구스티노는 회개하여 세례를 받았고,
뒷날 교회의 가장 위대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모니카의 ‘깨어 있는 사랑’이
한 영혼을, 나아가 온 교회를 살린 것입니다.
사랑·기쁨의 관점에서 보면
모니카의 눈물은 ‘기쁨의 씨앗’이었습니다.
응답이 더디다고 ‘깨어 있기’를 포기했다면,
그 기쁨의 수확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끝까지 깨어 기다리는’ 데서 기쁨으로 익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며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가?
나는 한 사람을 위해 ‘깨어’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제때에 양식을 내주듯’ 사랑으로 돌보는가?
나의 눈물은 ‘포기’가 아니라 ‘기쁨의 씨앗’인가?
주님,
모니카처럼 한 사람을 위해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응답이 더뎌도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그 눈물을 끝내 기쁨으로 거두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