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3,54-58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그분의 말씀에 고향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저런 지혜와 저런 힘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놀라움은 좋은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은 믿음으로 자라지 못했습니다.
곧바로 다른 말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 어머니와 형제들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꺼내며
그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 우리가 이미 아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안다고 여겨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식이 지혜를 가렸고, 익숙함이 신비를 덮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자리가 가장 먼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이것은 원망이 아니라 슬픔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장 깊이 오해받는 하느님의 슬픔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주님의 능력이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을 받을 자리가 닫혀 있었습니다.
은총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두드리시고 기다리십니다.
믿음은 그 문을 안에서 여는 손입니다.
오늘 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자렛 사람들이 던진 물음을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입니다.
그도 물었습니다. 이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그러나 그는 물음을 멈추지 않고
그 물음을 무릎 꿇는 자리까지 데려갔습니다.
그에게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었고,
신앙은 이성의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묻는 사람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고, 단정하는 사람은 멀어집니다.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은 물음이 아니라
물음을 너무 빨리 닫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평생 묻고 쓴 그가
마지막에 “모두 지푸라기 같다” 하고 침묵한 것은
지식의 포기가 아니라 지식의 완성이었습니다.
아는 만큼 말하고, 아는 것보다 크신 분 앞에서 잠잠해지는 것 ―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자리입니다.
영성 주간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단순한 마음’을 가르칩니다.
단순한 마음은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이 아니라,
알면서도 놀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어제 본 얼굴을 오늘 처음처럼 보는 마음,
내 가족과 내 공동체 안에서
아직 하느님이 하실 일이 남아 있음을 믿는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누구를 ‘이미 다 안다’며 닫아 두고 있는가?
내 익숙함이 가로막은 은총의 문은 어디인가?
나는 여전히 주님께 묻고 있는가, 아니면 단정하고 있는가?
가장 가까운 사람 안에서 나는 무엇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
주님,
가장 익숙한 자리에서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이미 안다’는 마음을 거두시고,
묻는 겸손과 믿는 단순함을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