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2025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일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결백하고 의로움을 자처하는 바리사이적인 기도와 보잘 것 없고 비천한 마음을 지닌 세리와 같은 기도를 통해서 참회와 겸손의 마음을 지니고 기도할 때 진정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 받는 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리사이’라는 표현이 바리사이 전체와 바리사이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사이는 약 6,000명 정도 추산하고 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의롭고 경건한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 중에는 그들의 법률지식을 자부하며 전통을 핑계로 하느님의 계명을 파괴하고(마태 15,1-20), 자신의 정의를 내세워 무식한 자들을 경멸하는 부류가 있었습니다(루가 18,11-12). 이들은 죄인들과 세리들과의 교제를 일체 금했고 그리하여 그들의 좁은 안목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좁은 테두리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율법 준수를 내세워 때로는 하느님에 대해서까지도 권리 주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마태 23,27).
바로 바리사이들 중에 이런 부류 사람들로 인해서 ‘바리사이’라는 말이 항상 논쟁적이고 부정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불행히도 그리스도교적 전통 속에서는 좋지 않은 용어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의주의라는 표현은 당시의 유다인들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닫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유의해 보면 이 용어는 복음의 정신에 반대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 반드시 바리사이 모두를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바리사이주의적인 태도로 기도하며 살고 있지 않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사의주의란 의로움의 탈을 쓰고도 이를 실천하지 않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거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 그런 태도를 말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좁은 종교적 지식의 테두리에 국한시키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외면적인 계율의 준수에만 급급하여 은총의 보편성을 무시한다면 바리사이주의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자기 실적을 자랑하는 교만한 바리사이적 기도여서는 안 됩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바리사이적인 기도는 자랑으로 변질되고 하느님의 판단을 대신하는 교만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세리의 마음과 같은 기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만을 간구합니다. 기도는 선택적 신심행위가 아니라 행위로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표지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그 자체입니다.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선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실존적 가난을 확인합니다.
세리처럼 너무나 약해서 죄를 지어 진실로 통회조차 할 수 없지만 인내하며 겸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 자비를 간구하며 진실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거기에 참된 의로움이 있습니다.
바리사이적 기도에 빠지지 않고 세리의 마음자리로 들어가 기도를 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0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2코린 8-13장 / 1테살 1-2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2. 희생: 속죄의 보속 제물
교부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인간의 신화를, 일종의 신적 교환 혹은 “거래”에 비유하는 것을 즐겨 말한다.
곧 장엄하신 하느님께서 연약한 죽을 인간의 조건을 취하시어, 인간에게 성화 은총과 초자연적 사랑의 신적 의복을 입히시고, 하늘에서 하느님을 뵙는 행복 직관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교환에 대하여 성 아우구스티노는 한 강론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우리에게 신성을 약속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여기셨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듯이, ‘네가 얼마나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내가 나의 신적 실재를 너에게 주려 한다는 것을 얼마나 확실히 믿어야 하는지 알기 원하느냐? 나는 너의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나 자신에게 취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람의 아들들을 하느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사람을 지으신 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아들은 우리가 부활의 영광을 입도록, 스스로 연약함을 취하셨다.
우리가 구원의 영광으로 관을 쓰도록, 스스로 굴욕과 치욕을 취하셨다.
우리가 지옥의 고통에서 풀려나도록, 스스로 극심한 고통을 취하셨다.
우리가 불사(不死)를 입도록, 스스로 죽음을 취하셨다.
타락한 인간이 유배에서 풀려나 하느님과 결합하도록,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버려지심”을 당하셨다.(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