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에 듣는 풀벌레들의 합창
가을밤이 깊어지면 낮 동안 세상을 가득 채우던 말들이 하나둘 잠들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문 안으로 돌아가고, 산등성이 너머로 마지막 노을마저 제 몸을 거두고 나면 어둠은 비로소 오래 기다렸다는 듯 들판과 숲과 작은 풀잎 사이에 고요한 장막 하나를 내려놓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한 마리 풀벌레가 먼저 울기 시작합니다. 누가 지휘봉을 들지도 않았고 누가 노래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풀숲 한 귀퉁이에서 가느다란 소리 하나가 피어나면 저만치 돌담 아래에서 또 하나의 소리가 대답하고, 논둑 너머에서, 이름 모를 들꽃 아래에서, 낮 동안 뜨거운 햇볕을 품었던 흙 틈에서 또 다른 작은 생명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꺼내어 가을밤의 거대한 합창에 들어섭니다.
찌르르, 찌르르, 귀뚤귀뚤, 어떤 소리는 가까이에서 들리고 어떤 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것은 단순한 벌레들의 울음이 아니라 한 계절이 다른 계절에게 건네는 아주 오래된 작별의 노래처럼 들립니다. 여름은 그렇게 떠나고 있는 것일까요. 뜨거웠던 햇살과 갑자기 쏟아지던 소나기와 무성하게 자라던 풀잎과 한낮의 매미 소리와 뜨거운 땅 위로 피어오르던 아지랑이까지, 한 계절 동안 살아 있었던 모든 것들이 이제 풀벌레들의 작은 몸속으로 들어가 마지막 노래가 되어 흘러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가을밤의 풀벌레 소리는 기쁘면서도 어딘가 쓸쓸합니다. 슬픔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맑고, 기쁨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아련한, 떠나가는 것과 남아 있는 것 사이에만 존재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마음 하나가 밤공기 속에 오래 머뭅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지나온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내 곁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 잠시 스쳐 갔지만 이상하리만큼 깊은 흔적을 남긴 사람, 사랑한다는 말을 충분히 건네지 못했던 사람, 미안하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던 사람, 어느 날 말없이 내 삶의 풍경에서 사라졌지만 가끔 가을밤이면 유난히 또렷하게 돌아오는 얼굴들을 생각합니다.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이 머물렀던 자리는 떠나지 않는 것인지, 세월은 흘러도 사랑했던 시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풀벌레들의 합창 사이로 오래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너무 서둘러 살아오지는 않았느냐고, 무언가를 이루느라 정작 네 곁에서 피고 지는 작은 생명들을 놓치며 살지는 않았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저 가을밤에 귀를 기울입니다. 풀벌레들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래를 알아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숨어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으면서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이 짧은 계절을 온몸으로 노래할 뿐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몸집은 그토록 작은데 그들의 노래는 밤보다 넓고, 생은 그토록 짧은데 그 울림은 별빛보다 오래 남습니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오래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은 피어 있을 때 꽃이고, 바람은 불고 있을 때 바람이며, 풀벌레는 울고 있을 때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가장 충만하게 살아냅니다. 그러므로 오늘 밤 저 작은 생명들이 부르는 노래는 사라짐의 노래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노래입니다. 나는 여기 있었다고, 이 작은 풀숲에서 한여름의 뜨거움을 견디고 비를 맞고 바람을 지나 마침내 가을을 만났다고, 그리고 지금 내게 남은 모든 생명을 모아 한 번뿐인 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그 노래를 듣다 보면 나 역시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생을 노래하고 있는가. 아직 오지 않은 날을 기다리느라 오늘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붙잡느라 지금 내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을밤은 아무 말 없이 깊어가고 풀벌레들의 합창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큰 목소리가 작은 목소리를 삼키지 않고, 어느 하나가 중심이 되려고 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높이와 서로 다른 리듬으로 울면서도 이상하리만큼 하나의 노래가 됩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세상도 이와 같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 앞에 선다고 해서 뒤에 있는 사람이 초라해지지 않으며,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만의 음색으로 살아가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방해하지 않고 마침내 하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세상.
어쩌면 형제라는 것은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를 지워버리지 않으면서 함께 하나의 노래를 만들어가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풀벌레들은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아무도 홀로 가을밤을 완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한 마리가 울면 다른 한 마리가 받아주고, 저쪽의 노래가 잠시 멈추면 이쪽의 작은 생명이 그 빈자리를 채우며, 그렇게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생명들이 서로의 존재를 허락하면서 밤 하나를 거대한 성전처럼 만들어갑니다.
하늘에는 별들이 떠 있고 땅에는 풀벌레들이 노래합니다. 그 사이에 내가 서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영원과 순간 사이, 떠남과 머묾 사이,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나도 하나의 작은 생명으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문득 알 것 같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내게 맡겨진 작은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며, 누군가의 외로움 곁에 조용히 머물러 주고, 내가 가진 작은 온기 하나를아낌없이 건네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풀벌레 한 마리가 가을밤 전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작은 노래 하나를 보탤 수는 있습니다. 별 하나가 밤하늘의 모든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만큼 빛날 수는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밤은 더욱 깊어갑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풀잎들이 서로의 어깨를 스치고,달빛은 말없이 지붕과 들판과 산길 위에 내려앉으며, 풀벌레들의 노래는 어둠 속에서 더욱 맑아집니다. 이제 나는 그들의 노래에서 쓸쓸함만을 듣지 않습니다. 떠날 줄 알기에 아름다운 것들의 평화와, 붙잡지 않기에 오래 남는 것들의 자유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세상을 충만하게 채우는 작은 존재들의 기쁨을 듣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그 소리 속에 머물고 싶어집니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고,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을밤 한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고 싶습니다.
언젠가 나에게도 내 노래를 멈추어야 할 밤이 오겠지만, 그날까지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누군가의 노래를 들어주고 누군가의 침묵을 기다려주며 누군가의 어둠 곁에서 아주 작은 소리라도 함께 내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도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가을밤 풀벌레 소리처럼 남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크지는 않았으나 따뜻했던 사람, 앞서지는 않았으나 곁에 있었던 사람,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들어주었던 사람, 붙잡지는 않았으나 사랑했던 사람, 자신의 노래를 높이기보다 다른 이의 노래가 들리도록 조금 비켜서 주었던 사람으로.
오늘도 가을밤은 깊어갑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풀숲에서 수많은 작은 생명들이 자신의 마지막까지 아낌없이 내어놓으며 노래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들이 들려주는 가장 큰 생명의 노래입니다. 지금 여기 살아 있으라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고, 머물 수 있을 때 머물러 주라고, 떠나야 할 때에는 아름답게 놓아주라고. 그리고 네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목소리로 다른 이들의 노래와 함께 이 세상이라는 커다란 합창을 완성하라고.
나는 오래도록 그 소리를 듣습니다. 가을밤은 깊고, 별빛은 고요하며, 풀벌레들의 합창은 끝날 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작은 노래 사이에서 내 마음에도 아주 작은 노래 하나가 태어납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노래, 함께 있음에 감사하는 노래, 떠나간 것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는 노래. 그렇게 오늘 밤, 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가고 풀벌레들은 온몸으로 노래하며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생명이란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동안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