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하늘을 보는 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 51절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앞에서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향해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을 훨씬 더 깊은 신비로 이끄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이 말씀의 배경에는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사다리**가 있습니다. 야곱은 베텔에서 꿈을 꾸는데,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층계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봅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중요한 것은 장소입니다. 야곱에게는 베텔이라는 장소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장소를 당신 자신에게로 옮기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새로운 베텔, 새로운 성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자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다리’가 아니라 ‘한 인격’이 계십니다 이 말씀을 육화의 신비 안에서 바라보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올라오라고 사다리를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상승보다 하느님의 내려오심이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높으신 분이 낮아지셨으며,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몸을 취하셨고, 거룩하신 분이 우리의 상처와 눈물과 실패가 있는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느님께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길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간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죽은 다음 하늘에 가면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쩌면 닫힌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삶에서 열린 하늘을 발견하는 삶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그대로입니다. 공동체도 그대로이고, 함께 살아가는 형제도 그대로이며,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도 그대로이고, 반복되는 일과 피곤함과 갈등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눈이 달라집니다. 관상의 눈이 열리면 평범했던 일상이 베텔이 됩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는 자꾸 하느님을 특별한 곳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육화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바로 여기다. 네가 피하고 싶은 그 사람 안에, 네가 받아들이기 힘든 그 관계 안에,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반복되는 하루 안에,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는 작은 손길 안에,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마음 안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섬김 안에,하늘과 땅이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삶에서도 하늘은 그렇게 열렸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하늘이 열린 곳은 화려한 성당이나 황홀한 신비체험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환자를 만난 자리였습니다. 그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존재, 역겨움과 두려움을 느꼈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 껴안았을 때, 그동안 닫혀 있던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회심은 어쩌면 하늘이 열린 사건이면서 동시에 눈이 열린 사건이었습니다. 하늘이 닫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나환자가 하느님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환자를 밀어내던 자기 자신이 만든 경계가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계가 무너지자 프란치스코는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거기에 계셨다는 것을.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가난과 겸손과 형제성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가난은 나를 비우는 것이며, 겸손은 타자가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고, 형제성은 그렇게 열린 공간에서 서로를 통해 하느님을 발견하는 삶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도 ‘열린 하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복음은 더욱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을 이어 주시는 분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갈라진 사람들을 이어 주고, 상처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밀려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누군가를 판단하기보다 품어주고, 용서받은 사람이 다시 용서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의 몸과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도 작은 육화가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는 단순히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하늘이 열리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신앙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내가 하늘이 되는 것 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늘이 열리도록 허용하는 것, 내가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빛이 지나가도록 비켜서는 것, 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통하여 그에게 흘러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묻는다면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하늘이 열리게 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네가 사랑하는 바로 그곳에서 하늘이 열린다. 네가 내려가는 바로 그곳에서 하늘이 열린다. 네가 자신을 내어주는 바로 그곳에서 하늘이 열린다. 그리고 네가 형제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너는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열린 하늘은 어떤 장소라기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관계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칸의 삶은 그 열린 하늘을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내는 것, 곧 내려가고, 내어주고, 받아들이고, 형제가 되어 줌으로써 우리 관계 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육화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