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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3 관계 속에 흐르는 선의 강물처럼

 

복음은 언제나 구체적인 사람을 향합니다.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곁의 한 사람을 외면할 수 없고, 가난한 이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공동체 안의 약한 형제를 부담스럽게 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평화를 기도하면서 내 마음 안의 미움과 화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복음은 성공을 보장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손해를 감수하고 오해를 견디며 자신을 내어주는 길이었습니다. 복음을 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해해 주는 것도 아니고, 공동체의 갈등이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복음 때문에 외로워지고, 자신의 뜻을 포기해야 하며, 사랑해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선은 결과에 따라 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성공했기 때문에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었기 때문에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으로 실패였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과를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랑을 행하고, 그 열매는 하느님의 손에 맡깁니다.

 

복음의 사람은 세상을 자기 힘으로 구원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 사랑의 도구임을 압니다. 도구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용하시는 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그래서 복음적 삶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무엇을 이루시도록 허락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성모 마리아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였듯,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전 존재로 같은 응답을 드렸습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성모님의 작은 집처럼 말씀이 다시 몸을 얻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형제들은 말씀을 듣고, 마음에 품고, 삶으로 낳아 세상에 건네었습니다. 복음을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태어나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목소리를 통하여 위로하시고, 우리의 손을 통하여 상처를 어루만지며, 우리의 발을 통하여 외로운 이를 찾아가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내어드릴 때 말씀은 다시 육화되고, 포르치운쿨라는 세상 한복판에 다시 세워집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자주 복음을 받아들일 공간을 잃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보다 나아 보이고 싶은 비교, 실패하지 않으려는 두려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자기 의지가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복음이 나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을 만큼만 받아들이고 싶어 합니다.

 

포르치운쿨라의 가난은 마음 안에 말씀을 위한 빈 공간을 만드는 일입니다. 나의 생각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고, 내 계획과 다르게 일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다른 이를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변화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마음에서만 자랄 수 있습니다. 자신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말씀이 머물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왕국을 내려놓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나의 왕국은 한 마음 안에서 동시에 중심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왕국에서는 나의 이름과 명예와 성취가 가장 중요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사랑과 자비와 공동선이 중심이 됩니다. 나의 왕국에서는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내가 다른 이가 살아날 수 있도록 작은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의 보물이 될 때, 우리를 오랫동안 묶어 놓았던 포장과 증명, 경쟁과 비교,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공동체 안에 선이 흐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시작한 일을 다른 이가 완성해도 감사하고, 나의 공로가 잊혀도 하느님께서 기억하신다는 사실로 평화를 누립니다. 이것이 포르치운쿨라가 가르쳐 주는 복음의 작은 자유입니다.

 

세상은 더 큰 몫을 차지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작은 몫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먼저 인정받으라고 하지만 복음은 먼저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자신을 보호하라고 하지만 복음은 자신을 내어주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원수를 무너뜨리라고 하지만 복음은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미움의 구조를 끝내라고 말합니다.복음은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참된 힘을 줍니다. 폭력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이 무력함이 아니라, 미움의 방식을 거부하는 영적 용기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사과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난 자유입니다.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은 그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이 나의 삶을 계속 지배하지 못하도록 사랑의 문을 여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찬양하면서 자신의 소유를 움켜쥐고, 그의 형제성을 기념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배제하며, 그의 평화를 노래하면서 관계 안에서는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준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만 기억할 뿐 그의 복음은 잊은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나병 환자를 껴안았고, 무너진 작은 성당의 돌 하나를 들어 올렸으며, 몇몇 형제들과 복음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작은 몫을 충실히 사랑했고,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몫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한 사람의 진실한 회심에서 시작됩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방향이며, 자신을 향하던 삶의 방향을 하느님과 형제와 피조물에게로 돌리는 회심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사랑받을 만하기 때문에 주는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흘러가는 선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작은 관계 속에서 복음의 몸이 되는 일입니다.

 

먼저 사과하는 한 사람, 말없이 아픈 형제를 돌보는 한 사람, 인정받지 못해도 기쁘게 봉사하는 한 사람, 경쟁보다 협력을 선택하는 한 사람, 피조물의 고통을 생각하며 자신의 소비를 절제하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형제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 아픈 이를 재촉하지 않는 것, 나보다 늦은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 걷는 것, 내가 옳더라도 관계를 살리기 위하여 한 걸음 물러서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조용히 맡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면 우리는 복음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이 됩니다. 우리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하느님은 너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하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지친 이에게 우리의 곁이 쉼이 되고, 잘못한 이에게 우리의 용서가 다시 시작할 문이 되며, 외로운 이에게 우리의 현존이 하느님의 함께 계심이 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복음은 읽고 설명하는 문서이기 전에 살아야 할 생명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삶에 적용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복음 안으로 옮겨 놓으려 했습니다. 그는 복음 가운데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말씀만을 골라내지 않았고, 시대의 편리함에 따라 복음을 부드럽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갔고, 가진 것을 나누라는 말씀을 들으면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았으며, 평화를 전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전쟁과 적대의 경계를 넘어섰고,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자신의 자존심보다 관계를 먼저 선택했습니다.

 

포르치운쿨라는 그러한 복음적 삶이 태어난 요람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은 더 이상 책 속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형제들의 발걸음이 되었고, 가난한 이에게 건네는 빵이 되었으며, 병든 이의 상처를 씻는 손이 되었고, 원수를 향해 먼저 내미는 평화의 인사가 되었습니다. 말씀은 그들의 몸을 통하여 다시 육화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들의 작은 일상 안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안전한 자리에서 불러내는 현장입니다. 복음은 문을 잠그고 안으로 숨어들게 하지 않으며,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거리를 두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사람에게 보내고, 가난한 이에게 보내며, 갈등의 한복판으로 보내고, 세상의 눈물을 향하여 걸어가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위로를 주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존재가 되라는 사명을 줍니다. 복음은 우리를 품어 주지만 우리 안에 가두어 두지 않고, 다시 세상을 향하여 파견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복음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새로운 이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그의 생각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의 눈과 손과 발과 몸 전체를 변화시켰습니다. 한때 역겨워 피했던 나병 환자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다시 복음으로 간다는 것은 결국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규칙이나 원칙보다 먼저 한 인격에게 돌아가는 것이며, 우리보다 낮아지시고 우리 가운데 몸을 취하시며 끝까지 사랑하신 그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복음은 네가 알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네가 살아 내는 사랑이라고. 복음은 네가 타인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아니라 네가 먼저 짊어지는 십자가라고. 복음은 너를 높이는 이름이 아니라 너를 낮추어 형제 곁에 앉게 하는 힘이라고. 복음은 멀리 있는 위대한 일이 아니라 오늘 만나는 한 사람을 존중하고 기다리고 용서하는 작은 행동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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