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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안에 그리스도를 낳는 모성적 신비주의

 

프란치스칸 기도와 모성적 신비주의

기도는 단순히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말이나 침묵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숨 쉬고 계시는 성령의 호흡입니다. 그 성령은 태초부터 성부와 성자의 사랑 안에서 하나이셨고, 때가 차자 동정 마리아 안에서 말씀을 육화하게 하셨으며, 오늘도 우리 삶의 가장 평범한 자리에서 끊임없이 그 말씀을 다시 육화시키시는 살아 있는 생명의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느님을 우리에게로 불러오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몸과 관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신비로운 과정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동안 무엇인가를 얻는 사람이기보다, 성령께 자신을 내어드림으로써 말씀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자궁이 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안으로 흘러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바로 이 육화의 신비를 삶의 중심에 둡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나기 위해 인간이 되셨고, 이제 인간을 통하여 다시 세상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에게 기도는 세상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일이며, 현실을 피하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복음으로 잉태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은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삶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의 생명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 속에 머물러 있는 육체가 아니라, 지금도 교회와 신자들의 삶 안에서 계속 자라나고 있으며, 우리는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체가 우리 안에서 사랑과 용서와 섬김이라는 삶으로 육화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의 몸 안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전통이 말하는 '모성적 신비주의'의 깊은 의미입니다. 모든 신자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말씀을 잉태하는 마리아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마리아가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렸듯이, 우리 역시 매일의 기도 안에서 자신의 계획과 욕심과 두려움을 비워 성령께 자리를 내어드릴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말 속에서 말씀하시고, 우리의 손으로 사랑하시며, 우리의 발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시고, 우리의 눈으로 눈물을 바라보시며, 우리의 가슴으로 세상을 품으십니다. 기도란 결국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훈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가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사랑의 허용입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는 언제나 관계적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홀로 거룩하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끝없는 사랑의 순환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삼위일체의 생명은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이며 다시 내어주는 완전한 상호성의 생명입니다. 기도는 바로 그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 흐름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게 하며, 형제자매와 화해하게 하고, 피조물과 화해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혼자만의 영적 체험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다시 연결되는 우주적 형제애의 시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갈망은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이끌고, 십자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셨지만 모든 것을 내어주셨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 모든 사람을 품으셨으며, 복수하지 않고 끝까지 용서하심으로 평화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는 힘에서 오지 않고, 소유에서 오지 않으며, 지배에서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에서 태어나고, 그 사랑은 반드시 견딤과 기다림과 희생을 통과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평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 방식이며, 고통은 그 사랑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입니다. 씨앗은 자신이 썩어야 열매를 맺고, 어머니는 산고를 통하여 생명을 낳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의 생명을 여셨습니다. 이처럼 참된 사랑은 언제나 자기중심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아픔을 통과합니다.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사랑이 자유롭게 흐르게 하는 사람만이 형제를 품을 수 있고, 피조물을 형제로 부를 수 있으며, 세상 한가운데에서 다시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 열매는 하느님을 만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도의 완성은 우리의 삶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육화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하루를 육화시키시고, 우리의 관계를 복음으로 변화시키시며,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빚어 가실 때, 우리는 비로소 프란치스칸이 꿈꾸었던 복음적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기도가 되고, 우리의 삶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또 하나의 작은 베들레헴이 되며, 우리의 사랑은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평화를 피워 올리는 성령의 끝없는 호흡이 됩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말하는 '관계 안에 그리스도를 낳는 모성적 신비주의'는 어떤 특별한 신비 체험 이전에, 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통해 태어나고 자라는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마리아 안에서 말씀을 육화하셨듯이,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관계 안에서 사랑을 육화하십니다. 그 실체는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자유를 기다리시는 것처럼, 나 역시 타인의 성장을 기다려 줄 때 성령께서는 그 관계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십니다.

 

이기기보다 이해하려 하고, 설명하기보다 공감하려 하고, 비난하기보다 품으려 할 때, 자아는 조금씩 십자가를 지고 그 빈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관계 안에서 육화되는 모습입니다. 용서를 결심하는 선택이며 결단입니다. 용서는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상대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부르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줄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다시 태어나십니다.

 

가정에서도 모성적 신비주의는 살아 있습니다. 배우자의 지친 얼굴을 바라보며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는 손길, 부모가 아이의 실수를 꾸짖기보다 다시 일어설 용기를 심어 주는 눈빛, 자녀가 늙은 부모의 느린 걸음을 맞추어 함께 걸어가는 발걸음 속에서 그리스도는 말씀이 아니라 삶으로 태어나십니다. 공동체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름 없이 봉사하는 사람, 인정받지 못해도 기꺼이 허드렛일을 맡는 사람,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고 다른 형제를 빛나게 하는 사람, 갈등이 생겼을 때 편을 가르기보다 화해의 다리가 되는 사람 안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의 존재를 통하여 공동체는 더 따뜻해지고 더 자유로워집니다.

 

프란치스칸이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여기에서 실체를 드러냅니다. 내적 가난은 관계를 위해 자기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내 체면을 내려놓고, 내 시간을 내어주고, 내 계획을 양보하고, 내 권리를 붙들지 않을 때, 비워진 그 자리에서 성령은 사랑을 육화하십니다. 피조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꽃 한 송이를 함부로 꺾지 않는 손, 물 한 방울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작은 새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감수성, 길가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를 생명의 형제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도 그리스도는 창조의 첫날처럼 다시 세상을 축복하십니다. 프란치스코가 태양과 달과 물과 불을 형제와 자매로 불렀던 까닭은 모든 피조물 안에 창조주의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성적 신비주의는 특별한 황홀경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 더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그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곁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면, 누군가가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면, 누군가가 용서받고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말과 눈빛과 손길을 통하여 다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 안에 그리스도를 낳는 모성적 신비주의의 가장 구체적인 실체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일상을 마리아의 마음처럼 열어 주실 때, 매일의 만남과 기다림과 용서와 섬김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태어나시는 삶이며, 프란치스칸이 말하는 복음적 삶의 가장 아름다운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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