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내는 사람이 태어난 날에
길을 내는 요한, 길이신 예수님, 그리고 길이 되어 가는 사람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던 빈 들판에서 그는 길을 닦았습니다. 왕이 지나갈 길도 아니고, 군대가 행진할 길도 아니었습니다. 상처 입은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쳤지만 사실은 돌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교만이라는 돌, 탐욕이라는 돌, 두려움이라는 돌, 자기 확신과 자기 의로움이라는 돌들을 걷어내며 주님께서 지나가실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삶은 비움의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는 길을 만들었지만 자신은 그 길의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자기에게 묶어 두지 않고 언제나 오시는 분을 가리켰습니다. 참된 영성은 사람을 자신에게 이끌지 않고 하느님께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길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길이 되셨습니다. 병든 이를 품어 주시는 손길이 길이었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자비가 길이었으며,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랑이 길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 사랑은 길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길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지배하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길이었고, 소유하는 길이 아니라 내어주는 길이었으며, 승리하는 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기꺼이 져 주는 길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바로 그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유함에서 가난으로,
권력에서 작음으로, 소유에서 형제성으로 걸어 내려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어떤 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길 자체가 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각자의 길을 걷습니다. 어떤 이는 병상에서 걷고, 어떤 이는 실패와 상실 속에서 걷고, 어떤 이는 외로움과 침묵의 긴 터널을 지나며 걷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깨닫습니다. 내가 길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길이신 분이 나를 찾아오고 계셨다는 것을. 내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줄 알았는데 그분이 먼저 내 삶 속으로 들어와 계셨다는 것을.
그 만남이 일어나면 사람은 달라집니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 구원받을까?"만 묻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기 시작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작은 길이 될 수는 없을까?" 절망하는 이에게 희망으로 다가가는 길, 상처 입은 이에게 위로가 되는 길, 외로운 이에게 함께 걸어 주는 길, 하느님을 잊어버린 이에게 그분의 따뜻함을 전하는 길이 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길에서 길을 만나 마침내 길이 되어 가는 삶. 내가 만난 사랑이 나를 통하여 흘러가고, 내가 받은 자비가 또 다른 이에게 전달되며, 내가 경험한 하느님의 현존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표지가 되는 삶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얼마나 많은 것을 아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길이 되어 주었는가에 있습니다. 길을 내는 요한처럼 자신을 비우고, 길이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며, 성 프란치스코처럼 작고 가난한 형제가 되어, 누군가의 삶 한가운데 놓인 작은 다리가 되고, 한 줄기 오솔길이 되고, 한 줌의 빛이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관계 안에서 서로를 살리고 품어 주는 사랑의 흐름 자체가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이 서 계십니다.
성경에서 길은 관계의 방식이며, 존재의 방향이고, 삶이 흘러가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나를 따라오면 천국에 간다"는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곧 하느님께 이르는 방식이다." 라는 선언입니다. 길이 말하는 가장 구체적인 진실은 관계 안에서 드러납니다. 길은 혼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길은 언제나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 줄 때 길이 생깁니다. 내가 먼저 사과할 때 길이 생깁니다. 내가 이해받기보다 이해하려고 할 때 길이 생깁니다. 내 고집을 조금 내려놓고 상대를 위한 공간을 내어줄 때 길이 생깁니다. 용서가 시작되는 곳에 막혔던 길이 다시 열립니다. 감사가 시작되는 곳에 굳게 닫혔던 길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부부가 서로를 기다려 주는 순간, 부모가 자녀의 실수를 품어 주는 순간, 형제가 형제의 아픔을 대신 짊어져 주는 순간,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부족함을 비난하기보다 덮어 주는 순간,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는 길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프란치스칸적으로 말하면 길의 가장 깊은 진실은 내려감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에 길을 만들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기에 길이 되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높아지려 하지 않고, 소유하려 하지 않고, 증명하려 하지 않고, 이기려 하지 않고, 작은 형제가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길이 되었습니다. 길은 결국 사랑의 흐름입니다. 사랑이 흐르면 길이 열리고, 사랑이 멈추면 길도 막힙니다. 그래서 길의 반대말은 길 없음이 아니라 막힘과 단절입니다. 자존심이 막고, 비교가 막고, 소유욕이 막고, 두려움이 막고, 판단과 단죄가 막습니다. 반대로 겸손은 길을 열고, 자비는 길을 열고, 경청은 길을 열고, 기다림은 길을 열고, 감사는 길을 엽니다.
길이 말하는 가장 구체적인 진실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과 사람에게 가는 길은 하나라는 것.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앞의 형제에게 가는 길을 막아 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관계라는 길 위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에서 길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의 길이 되어 줍니다. 지친 사람에게는 쉼의 길이 되고,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방향의 길이 되고,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위로의 길이 되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동행의 길이 됩니다. 이것이 길의 마지막 진실입니다. 길의 목적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선이 흐르는 곳마다 광야는 길이 되고, 길은 관계가 되며, 관계는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