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적 존재로서의 지혜
세상은 늘 분주하게 계산합니다. 어느 편이 이기는지, 어느 쪽이 더 높이 오르는지,누가 더 많은 박수를 받는지. 눈에 보이는 승리의 깃발이 펄럭일 때 사람들은 안도하고,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고개를 돌립니다. 권력은 스스로를 지혜라 부르고, 효율은 정의의 옷을 입고, 성공은 축복의 증표인 듯 행세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그것은 잠시뿐인 지혜라고.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속에서만 통하는 계산일 뿐이라고.
하느님의 지혜는 다릅니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아득한 창조 이전의 고요 속에서 이미 준비된 신비였습니다. 그 신비는 하늘의 보좌에서 빛나는 권능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기로 정하신 하느님의 조용한 결심이었습니다. 지배하지 않으시고, 억누르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스스로를 비워 인간의 운명 안으로 들어오시는 길. 그 길이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에 실패였습니다. 손에 못이 박히고, 이마에 가시가 얹히고 숨이 끊어지는 그 자리에서 누가 승리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권력자들은 안도했을 것입니다. 질서는 유지되었다고, 위협은 제거되었다고, 정의가 실행되었다고.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알았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순간, 그들이 붙들고 있던 지혜의 토대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가 완성되는 자리였습니다. 사랑이 끝까지 가는 자리, 용서가 마지막 숨결까지 머무는 자리, 증오가 더 이상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자리. 그날, 세상은 승리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사랑이 승리했습니다. 침묵 속에서, 피 흘리는 육신 안에서, 조롱과 외면 속에서 하느님의 지혜는 조용히 빛났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재려 합니다.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얼마나 영향력을 가졌는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살아냈는지. 공동체 안에서도 관계 속에서도 우리 마음은 종종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이 길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의 계산을 멈추게 합니다. 거기에는 이익도, 보상도, 눈에 보이는 성공도 없습니다. 오직 끝까지 남는 사랑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항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 인정받지 못하는 자리, 억울함이 스며드는 자리. 그 자리에서 당신은 도망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두려워했고, 두려웠기에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해되지 않는 사랑 앞에서 불편해지고, 설명되지 않는 용서 앞에서 초조해지고, 손해 보는 선택 앞에서 고개를 젓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언제나 그렇게 옵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으로, 패배처럼 보이는 인내로, 무력해 보이는 온유함으로. 그리고 그 어리석음 속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영광의 시작이었습니다. 인간을 억누르는 영광이 아니라, 인간을 일으켜 세우는 영광. 지배하는 영광이 아니라, 함께 고통받는 영광. 하느님은 우리 위에 군림하기보다 우리 곁에 매달리기를 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지혜가 드러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처럼 보이는 자리가 있다면, 사람들이 실패라 부르는 자리, 아무 열매도 없는 듯한 자리, 침묵과 오해가 가득한 자리라면, 어쩌면 그곳이하느님의 지혜가 숨 쉬는 자리일지 모릅니다. 세상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으나 하느님의 마음에는 이미 완성된 그 신비의 자리. 십자가는 사라지지 않는 질문으로 우리 앞에 섭니다. “너는 어떤 지혜를 따르겠느냐.” 높아지려는 지혜인가, 낮아지려는 지혜인가. 지배하려는 지혜인가, 내어주려는 지혜인가. 우리가 사랑을 선택하는 순간마다 세상은 조금씩 패배하고, 하느님의 지혜는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느린 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시작된 그 빛은 여전히 우리의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도구로 남을 것인가? 무기로 남을 것인가? 하느님의 지혜을 배우는 사람은 이러한 질문을 자신에게 합니다. 도구로 남는 자유, 무기가 되지 않는 몸, 나는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중심이 되는 길, 다른 하나는 내가 도구로 남는 길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면 모든 것은 나를 향해 휘어집니다. 관계도, 기도도, 봉사도 결국은 나를 증명하기 위한 재료가 됩니다. 그때 내 몸은 선물이 아니라 무기가 됩니다. 말은 설득이 아니라 지배가 되고, 침묵은 겸손이 아니라 계산이 되고, 선행은 사랑이 아니라 투자로 변합니다. 돈과 쾌락과 안전은 마치 구원의 약속처럼 속삭입니다. “조금만 더 가지면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더 누리면 만족할 수 있어.” “조금만 더 확보하면 두렵지 않을 거야.” 그러나 우상은 결코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우상은 사로잡고, 노예로 만들고, 마침내 파멸시킵니다. 돈은 끝없이 더 요구하고, 쾌락은 점점 더 강도를 높이고, 안전은 점점 더 큰 벽을 쌓게 합니다. 나는 지키기 위해 싸우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경계하며, 결국 사랑을 잃어버립니다.내 몸은 하느님을 전하는 성전이 아니라 불안을 방어하는 요새가 됩니다. 그러나 내가 도구로 존재할 때,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나는 중심이 아니라 통로가 됩니다.나는 소유자가 아니라 전달자가 됩니다. 내 몸은 자비가 흘러가는 강이 되고, 내 말은 하느님을 선물하는 숨결이 됩니다. 나는 빛을 소유하지 않지만 빛이 지나가게 할 수는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만들어낼 수 없지만 사랑이 머물 자리를 비울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내 몸을 재료로 내어 드리는 것, 그분의 진리에 내 시간을 섞어 드리는 것, 그분의 자비에 내 상처를 보태는 것. 이것이 도구적 존재의 길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판다”는 것은 재산 목록을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나의 명예, 나의 계산, 나의 통제권. 그것을 손에서 놓을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도구는 억압된 존재가 아닙니다. 도구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자기 목적에 매이지 않고 창조주의 목적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도구로 존재하는 삶은 패배가 아니라 가장 깊은 영광입니다. 자비의 전달자로, 진리의 협력자로, 은총의 통로로 살아가는 몸. 그 몸은 더 이상 무기가 아닙니다. 그 몸은 하느님의 선물이 됩니다. 하느님, 저를 당신 자비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아니라 당신이 흘러가게 하소서. 그렇게 사는 것이 당신에게서 배우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