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수줍어하는 수사슴을 보기
겸손은 영성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한 마리의 수줍어하는 수사슴과 같다. 당신이 자신의 선물들을 과대 혹은 과소평가하거나 어떤 식으로 다른 이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자아를 강화시킬 때, 이런 자신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방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다음을 기억하라.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돕는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내세우거나 우리의 선물들의 혜택을 어떤 이도 받지 못하도록 숨기도록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게 한다.)
첨언) 우리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지만 자기가 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죄책감에 빠져 있거나 자기를 ‘못난 이’라고 여기는 순간들이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순간들입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자신을 과대평가할 때, 자신은 이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특히 옳다고 여겨지는 것과 공동체를 위한다는 것에 매여 있을 때에 그러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옳음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통합적으로 나를 보지 못하고 나의 부분을 봅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부분만을 보고 판단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에서 수도회에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다고 그것이 자기에게 참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그리고 자기가 속한 무리를 과대평가하는 이라면, 이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오히려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당하는 무시와 외면 가운데에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평화로 넘어갈 때, 자기에게 진정 기쁨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응답을 할 때 가능하고 이 가운데 하느님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순간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일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또 다른 순간은, 우리가 표면적으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매여 있을 때입니다. 형제들과 사람들이 성인으로 여기는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기도에 열중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형제였습니다. 그 형제는 침묵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가끔 고해성사를 할 때에도 말로 하지 않고 몸짓으로 할 정도로 침묵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프란치스코 이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의 이런 열심을 이렇게 읽어내었습니다. “이는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기 위한 마귀의 유혹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장상에게 그 형제에게 고해성사를 말로 보게 하라고 조언을 했었습니다. 그 형제는 이 장상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수도회를 떠나갔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에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권고 19. 하느님의 겸손한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