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일깨우는 수난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은 성프란치스코를 완전히 사로잡은 하느님의 매력이었습니다. 겸손은 관계를 회복하는 내려가는 사랑이었고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는 내적 죽음이었으며 수난의 사랑은 견디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 용서하는 사랑으로 치유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육화된 그리스도의 얼굴은 창조된 만물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 얼굴을 알아보는 눈은 영의 활동을 너와 나와 자연생태계의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발견할 때 열립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내어주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몸이며 당신의 생명을 아버지께 다시 내어드림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몸입니다. 내어놓는 마음에 깃든 사랑의 영이 성령이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영이고 수난의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입니다.
내어주고 받아들여지는 관계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이사를 왔습니다. 십자가는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일상의 관계에서 서로에게 저지른 짓에 대한 현재를 나타내는 비극적인 아픔입니다. 날마다 가공할 일들이 벌어지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희망을 일깨우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사랑으로 이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속죄, 속량, 죗값이라는 대속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사랑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내어놓는 나의 생명이며 내면의 죽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내가 선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희망을 봅니다. 무엇인가를 바쳐야 얻을 수 있다는 강박과 불안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선물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력으로 얻을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 자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언제나 하나의 선물이고, 관계 안에서의 협력이며 참여하는 행복으로 나타나는 기쁨입니다. 십자가가 희망을 일깨우는 견딤과 기다림과, 용서하는 사랑이라면, 희망은 내어주는 기쁨에서 성장합니다. 안전하다는 느낌과 내적 고요와 더불어 평화로운 안정감이 깊은 만족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깊은 만족에서 나오는 믿음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밝고, 맑고, 활기찬 태도로 너를 대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면 그와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게서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없으면 그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아닌 이방 민족들이 섬기는 하나의 신일 것입니다. 그 하느님은 부분적인 하느님, 모조품처럼 지어낸 하느님, 하느님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는 하느님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는 사랑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더 큰 희망을 품게 되고 안전과 안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선을 행하고 업적과 공로를 많이 쌓아서가 아니고 하느님이 선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상대방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치는 어떤 것에 반응하시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계산기가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상대방이 나에게 주는 매력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누가 착하고, 수입이 많고, 몸매가 매력적이고, 신분이 높고, 성품이 좋으면 그에게 자기를 내어주거나 그를 좋아하기 훨씬 쉽습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주는 대로 받는 인과응보의 실력사회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을 삶의 방식으로 선택한 이들은 하느님의 무상성인 은총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대상을 가리거나 차별하거나 특정한 개인을 선호하시지 않습니다. 보편적이고 조건 없는 완벽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으면 그 순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에 경탄합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기쁨을 온몸으로 발산합니다. 그 사랑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런 사랑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랑 앞에서 인간은 백기를 들고 완전히 항복을 선언하게 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루가 5,8)
“하느님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하느님! 당신은 누구 십니까? 또한 벌레만도 못한 나는 누구입니까? (성프란치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