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신심이라고 하나요?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
수많은 이들이 복음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신심 위주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성체 신심, 성모 신심을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의 신심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복음의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회개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기보다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신심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바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봅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여라” “너희는 썩지 않는 열매를 맺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심으로 드러내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높여 우월감의 중독에 빠진 이들은 자신의 지위를 지탱시키고 현상 유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종교를 이용합니다. 이들은 다수가 걷는 길을 옳다고 생각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하고 몸과 마음을 움직여 현실을 돌파하기보다는 항상 편한 쪽을 선택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변명과 거짓말로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고 합리화시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품위를 지키겠다는 집착 때문에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기도문을 더 많이 암송하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자신의 변화가 관계의 변화로 관계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로 이어지는 회개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용기가 없습니다. 용기는 누군가로부터 지지를 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나옵니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대가를 치르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서 일러준 대로 행동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용기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고, 용기는 경험을 통해 앎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앎에 의하여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경험한 것이 옳다는 믿음으로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배우지 못한 평민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처녀의 임신과 출산, 이집트의 피난 길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경험된 앎이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관계의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는 어디서나 진리이며 이 진리의 보편성 안에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무상성이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구체화 됩니다. 그러므로 너는 물리쳐야 할 원수가 아니며, 경쟁의 대상도 증명해서 내보일 대상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나에게 가져다주는 소중한 너 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반대되는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이 인과응보의 논리로 무장한 우상의 실재입니다. 그 우상이 바로 나 자신이 될 때 관계는 무너지고 하느님과 너와 자연 생태계의 모든 피조물은 단순히 이용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벌이 두려워 행동하고 상을 받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할 대상을 찾을 뿐입니다.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너의 필요를 알아차려서 네가 원하는 방법으로 필요를 채우는 데서 나옵니다. 기도문을 얼마나 많이 암송했느냐? 얼마나 많은 희생을 바쳤느냐? 성당에서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느냐? 얼마나 많은 성금을 내고 헌금을 냈느냐? 를 가지고 신심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관계를 돌보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만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업적과 공로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만심이 얼마나 큰 죄의 뿌리인가를 모르는 채 오로지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마음으로 바치는 데 온갖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맙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야고보 1,26-27)
하느님의 현존과 만나는 실재는, 이론보다 구체적이고 경험된 앎에서 나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신비는 말씀의 잉태와 출산이 하느님의 현존과 만나는 관계에서 구체화 됩니다. 사람의 몸에 잉태된 말씀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사랑에 빠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몸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보이는 하느님과 하느님으로 보이는 사람과 사귀는 일치와 친교가 내면에 흔적을 남기는 기쁨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것은 내어주는 사랑에 내어주는 사랑으로 응답하는 선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그 행복을 지금 여기서 누립니다.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과의 관계의 실재가 상호 간에 내어주는 기쁨으로 꽃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입니다. 회개하는 이들이 경험으로 아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