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모승천(1475-1476)
작가 : 프란체스코 보티첼리(Fanceco Botticelli :1446-1497)
크기 : 템페라 228cm X 377.2cm
소재지 : 영국 런던 국립 미술관
재생이라는 뜻의 르네상스 운동은 14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이태리에서 시작된 문화 운동이며 과거 신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로 인간적인 가치가 폐쇄나 위축 상태에 있던 현실에서 도약의 표현으로 시작된 운동이며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이태리 중부의 작은 도시 피렌체가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달되면서 이것이 단순한 경제적 풍요만이 아니라 과학 기술 예술 인문학의 발달로 이어져 참으로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문화 운동으로 정착되었는데, 여기에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 메디치라는 가문이었다.
변변찮은 상인 신분으로 시대 징표를 잘 읽어 교황청 재산 관리까지 맡으면서 큰 재산을 모은 이 가문은 “개처럼 모아 정승처럼 쓴다는” 기품있는 경제를 손수 실천해서, 모은 돈으로 예술과 학문에 투자해서 많은 예술가 학자들을 후원하고 키워 유럽 수준에서 평범한 수준의 도시가 긍정적인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도시로 부상했으며 문화 예술과 함께 경제면에서도 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252년 발행된 피렌체 화폐인 플로린 금화(gold florin)는 영국, 프랑스, 헝가리 등 유럽 전역에서 공용화폐처럼 통용되어 산업 발전의 근간이 될 만큼 피렌체의 위상은 대단했다.
이 작품은 이 도시에 살던 마태오 팔미에리 (Matteo Palmieri :1406-1475) 라는 귀족이 자기 가족 무덤용으로 제작된 경당을 위한 작품이었다.
그는 단순히 돈 많은 귀족만이 아니라 당시 대단한 문화와 예술의 품격을 지녔던 피렌체의 위상에 어울리는 대단한 인격자이며 사업가 외교관을 겸해서 그 도시 성격에 걸맞는 준수한 인격자였다,
여기에 겹쳐 그는 여러 외국어를 익히고 고귀한 인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인격자였다. 이 작품은 돈의 가치로 측정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대단한 학문적 바탕 뿐 아니라 예술적 안목까지 있던 이 작품의 주인인 마태오는 당시 피렌체에서 한다 한 화가들이 많던 중에 자기 취향에 맞는 작가에게 이 작품 제작을 의뢰했으며, 이 작품은 무덤 경당에 제단화로 당시로서도 대작에 속하는 것이었다.
성모승천은 가톨릭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표현하는 중요한 신심이다. 성서 어디에도 성모승천에 대한 내용이 없으나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 감각으로 믿고 있던 이 신심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 정착시켰다.
“오직 성서만으로”를 외치는 개신교적인 표현은 순수하고 정확한 면과 함께 참으로 편협하고 미숙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아들의 돌 사진만으로 그 아들의 성장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성서가 신앙의 중요 자료임을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신앙의 폭과 깊이를 키우기 위해선 가톨릭 교회처럼 신자들의 신앙 감각, 즉 신자들이 자기 삶으로 이해한 신앙의 내용도 믿을 때 신앙은 내용상으로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면에서도 더 풍요로워 진다.
오늘 국민들의 근심을 더 해주고 있는 이 정부의 큰 지지 세력의 하나가 개신교 교파이다. 조각천으로 만든 밥상보 같은 개신교의 교파 중 여럿이 이 정부의 부패와 악정을 합리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성서의 구절을 들어가면서 악질 위정자들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있다. 여기에 맹종하고 동조하는 우매한 맹신자 광신자들이 주말이면 광화문에서 난동을 부리면서 국가의 수준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위탁한 마태오의 해박한 지식에서 나온 권고를 따라 천상과 지상으로 구분해서 작품을 구성했다
지상의 중간엔 성모님이 승천하시면서 남긴 빈 관 주위를 제자들이 서 있다. 전승에 따라 성모님이 계시던 빈관에는 가득 찬 흰색 백합 주위에 향기를 더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제자들의 표정은 성모님의 승천을 확인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경건한 자세가 아니라 성모님이 갑자기 자기들의 주위에서 사라졌다는 것에 더 비중을 두면서 어리둥절하고 황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로 표현되던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인간적인 정감 느낌을 과거처럼 무시하거나 열등 표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면서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임을 알리고 있으며 이것은 과거 상상도 못하던 표현이었다. 무조건 믿음을 강요하는게 아니라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인간적 여백을 주고 있다.
중세기적 사고방식에 의해 산이나 높은 곳은 더 경건하고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표현되었다. 위계 질서에 있어서 인성을 타고난 인간은 신성이 본질인 천사들 보다 하급이기에 제일 아랫 부분에 성인들을 배치하고 그 위에 천사들의 무리, 그중에서도 가장 상층에 속하는 제일 위에는 붉은 옷의 천사가 있는데 이것은 천사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인 세라핌 천사들로서 성모님을 옹위하고 있다.
세라핌 천사들의 붉은 옷은 아마 이것은 당시 교회에서 교황 다음 계급인 추기경들이 붉은 옷을 입은 상징에서 원용해서 하느님이 만드신 천사들 중 최고의 등급인 천사들의 옹위를 받는 성모님과 그 어머니에게 왕관을 씌우는 아들 예수를 배치함으로서 천상 하느님의 성자이시며 성모의 아들이신 예수와 하느님의 딸이시며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위대한 모습을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격상시켰다.
개신교처럼 하느님은 한분 뿐이시며 예수님은 하느님의 성자이시기에 이것만 믿어만 된다는 사고방식이 순수한 것이 아닌 얼마나 편협한 신앙 표현인지를 이 작품은 알리고 있다.
작가는 성모님의 승천이 자기가 살던 피렌체 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해서 관람자들에게 성모님의 승천이 바로 자기 삶의 정황에서 이루어 진 것으로 표현하면서 친근감을 더하고 있다. 이것 역시 가톨릭 신앙의 멋스러운 표현이다. 신앙의 내용은 성서 어느 구절이 아닌 바로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에서 체험되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신앙이 공허한 이론이 아닌 우리 삶의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는 실재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성모님의 승천 장소는 현재에도 예루살렘과 터키의 에베소 두 곳으로 교회는 인정하고 있다. 예루살렘 시온 산 위에 있는 성모 승천 성당은 과거부터 내려오던 성모 승천 장소이며 터키의 에베소는 근래에 교회가 인정한 것이다.
에베소에 정하게 된 것은 전승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사도 요한에게 성모님을 맡기신 후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 선교 가면서 성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거기에 성모님이 승천하셨다는 내용이며 또 여기에 읽힌 참으로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1881년 10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온 줄리앙 꾸예(Julien Gouyet)라는 신부가 에베소 인근의 야산에서 작은 돌집을 발견하고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어서 그 집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했다.
이 신부는 독일의 아우구스티노 봉쇄 수녀인 안네 카테리네 엠메리히(Anne Catherine Emmerich: 1774-1824)가 꿈에 보고 적은 것을 기억하면서 성모 승천과 에베소를 연결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안네 수녀는 일생 동안 병상에 있었기에 에베소 근처에 와본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 중 꿈에 자주 이 성지를 너무도 선명히 보게 되어 이것을 그림으로 남겼다.
에베소 인근의 아름다움 숲속에 성모가 세상 떠날 때까지 살았다는 돌로 지은 집을 꿈에 보았다는 것이다. 파리에서 온 꾸예 신부는 에베소를 방문해서 그 수녀가 본 돌집을 찾음으로써 여기 성모님이 승천하신 자리임을 믿는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터키의 모슬램 신자들로 성모님을 공경하기에 여기 기도하는 곳이 되었다.
이것은 신앙의 차원이 세상의 차원과 같은 현실 증명성을 초월해서 신앙의 내용을 심화함으로써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승화됨을 알리는 것이다.
마치 작가가 성모님의 승천을 자기 고향인 피렌체로 표현한 것처럼 신앙의 내용은 더 없이 심화된 것이기에 가장 현실적인 것이면서도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성모님의 관을 둘러 쌓고 있는 제자들 양쪽에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이 작품의 기증자 마태오 내외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서에 나타나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오 6,1-4)는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이것은 성서의 바른 인용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일생의 통해 지은 죄의 용서를 청하거나 아니면 루카 복음에 나타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신앙을 표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고통이 너무 심하자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으나 한 사람은 오히려 그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자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39) 라는 말씀을 들은 강도의 신앙 고백을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참으로 마태오 부부의 깊은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성모 승천이라는 신앙적 사건을 통해 신앙은 인간적 한계를 초월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의 내용을 전달함으로써 감동을 주는 것임을 알리고 있다.
어떤 이는 성서에 성모님께 대한 내용은 아주 적은 부분이라는 것으로 성모님의 존재성을 격하시키고자 하나 성서 전체가 성모님의 존재에 대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가 제정한 성모 호칭 기도는 성모님의 다양한 면모를 너무도 실감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천상 은총의 어머니” “사랑하올 어머니” “슬기로운 어머니” 등 성모님의 다양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침이 없는 성모님의 모습은 루카 복음의 다음 구절을 통해 너무도 선명하면서도 심원하게 드러내고 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 (루카 1: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