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Navigation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조회 수 17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우리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종교적 관점이든 아니든,
카톨릭의 관점이든 불교의 관점이든
우리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각자의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욕심이든,
우리 모두를 위한 생각이든
인간은 좋음을 추구합니다.
무엇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생각의 범위는 생각보다 이해하지 못할정도로
넓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좋음을 추구한다는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려서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편안함을 추구하고,
맛있는 것을 원하며
여유를 즐기고 싶어합니다.
먼 거리를 걸어가기 힘들기에 차를 이용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손쉽게
사서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음을 얻는 것에는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싼
자연에서 온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식량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 기름까지
어느 것 하나 자연에서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즉 우리 삶은 자연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이용이라는 단어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달라고 요청하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자연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연에게 요구합니다.
자연은 그 요구가 벅차면서도
힘겹게 그 요구를 들어주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은 '조금 더'를 외쳤습니다.
자연이 베풀어주는 호의를 권리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 요구는 착취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은
창조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처럼 요한복음도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두 문장은 서로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결국 같은 것,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이야기합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면서
반복을 통해서 복음은 그 내용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인간과 자연은 같은 위치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인간과 자연이 같은 위치에 있다는 표현은
온전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인간만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점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다릅니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을
꼭 우위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를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높다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인간은 자연의 호의를 권리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지양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은 죄를 이야기하면서
계명과 연결시키기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성과 연결시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9장에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거기에서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잘 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을
요한복음은 죄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지 않는 것을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이 다른 피조물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 생각은 자칫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올라갑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모든 것이 다 허락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인간은 한계를 뛰어넘고 싶습니다.
한계가 없는 존재는
신과 같은 존재이며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리에 서고 싶어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하느님이 필요없습니다.
즉 자연을 우리의 형제자매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자연보다 높다고 생각하면
그 결과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죄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 빛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다가갑니다.
그 빛은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생명과도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즉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빛을 거부하는 것이며
스스로 생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심판을 통해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실로 인간은
자연을 형제자매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그 찬미에 모든 피조물을 초대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게서 나왔기에
서로 형제자매로서 손을 맞잡고
하느님을 찬미하자고 초대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기 위해서는
형제성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 형제성은
각 피조물의 고유함을 인정하는 방식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식물은 식물로서
동물은 동물로서
서로 다릅니다.
서로 다르기에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있고
일치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치의 모델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여주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른 위격이시며
서로 다르시면서 한 분 하느님으로 계십니다.
즉 일치와 다양성이 공존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일치도
다양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내가 옳고 네가 틀린 것이 아니라
나도 옳고 너도 옳으며
그렇게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그 다름을 전제로
우리는 하나를 향해 나아갑니다.
더 나아가 인간과 다른 피조물이 서로 다르지만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수 있고
착취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좋음을 추구합니다.
그 길에서 자연과 함께
그 좋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좋음은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자유나눔 게시판

자유롭게 글을 남겨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57 사랑하는 자는 사랑 받는 자 안에서 기뻐한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 받는 자 안에서 기뻐한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서 프란치스코의 인간성 안에서 삶의 방식을 배워... 이마르첼리노M 2021.11.27 280
1256 정동 수도원 이야기 (5) 정동 수도원 이야기 : 아폴리나리스 신부님 (5) 그분이 방인 회원 양성에 대해 보인 태도와 관심은 참으로 예언적이었다. 오늘에 비해 삼분의 일도 되지 ... 이종한요한 2021.11.26 335
1255 성전 파괴에 대한 말씀을 듣고 성전 파괴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자신만 자유롭게 하려는 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관계의 지옥이다.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더 자유롭게 된다... 이마르첼리노M 2021.11.23 324
1254 닮아가는 삶에 희망이 있다. 닮아가는 삶에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의 주된 관심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가까이서 본받고 닮으려는 데 있다. 성프란치... 이마르첼리노M 2021.11.16 292
1253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살라는 말씀이다.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살라는 말씀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가 되면 우리가 미사 때 듣는 복음은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 이마르첼리노M 2021.11.15 343
1252 정동 수도원 이야기 (4) 정동 수도원 이야기 (4)  -  이 아뽈리나리스 관구장 관구장으로서 임기를 끝낸 후 로마 총본부로 가서 양성 학문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세계적으로 우리 ... 이종한요한 2021.11.11 356
1251 정동 수도원 이야기 (3) 정동 수도원 이야기 (3) 캐나다 형제들이 일본 제국주의 감시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 관구의 초석을 놓으며 단단한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 이종한요한 2021.11.11 324
1250 역설이 남긴 유산 역설이 남긴 유산   십자가는 삶의 유산이다. 십자가의 역설을 삶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믿음, 비극적인 것을 통합하여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생명의 에... 이마르첼리노M 2021.10.27 362
1249 마주하는 얼굴들 마주하는 얼굴들   행동하는 자비와 선은 창조에 대한 응답이며 새로운 창조를 이룬다. 홀로 있는 시간, 고독한 시간, 외롭다고 느끼는 시간은 광야로 나가... 이마르첼리노M 2021.10.21 368
1248 변화로 가는 길에서 변화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변화된 사람은 관계적 변화로 나아가며 관계적 변화는 보편적 변화로 나아간다. 이러한 변화가 없으면 변화... 이마르첼리노M 2021.10.18 339
1247 하느님의 정원에서... 하느님의 정원에서...   가난함과 기도에 피는 꽃 작음과 겸손함에 피는 꽃 사랑과 자비에 피는 꽃 정직과 단순함에 피는 꽃 고요함과 평화에 피는 꽃 자... 이마르첼리노M 2021.10.17 349
1246 여기 국밥을 시작하며 여기 국밥을 시작하며   사랑하는 여기 선교 협동조합 조합원과 후원자 형제, 자매 여러분과 저희를 사랑해주시고 기도해주시는 모든 형제자매님들께 주님께... 김레오나르도 2021.10.17 712
1245 십자가의 역설을 삶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믿음 십자가의 역설을 삶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믿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 이마르첼리노M 2021.10.15 306
1244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변화의 길 (2) (1)에서 이어짐 내려가는 길은 아름다운 길이다. 통제와 지배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오르려고만 했던 과정에서 피 흘리는 싸움으로 생명의 에너지를 허... 이마르첼리노M 2021.10.14 305
1243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변화의 길 (1)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변화의 길 (1)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마태12,48) “믿는 영혼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마르첼리노M 2021.10.14 293
Board Pagination ‹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 100 Next ›
/ 100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