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우리의 믿음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주소서 주여!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고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성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린 성프란치스코의 기도)
올바른 신앙은 나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나로 시작하였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고 기도와 희생과 재물을 많이 바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하느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받은 사랑이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워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느님께 돌려드리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응답은 우리의 관계 안에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 3, 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잘한 사람 상주고 잘못한 사람은 벌주는 인과응보적 틀에서 벗어나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확신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나를 통하여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과정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세 가지로 표현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데 그 대답에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하는 베드로의 대답은 인간 예수 안에 그리스도 곧 구세주가 육화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둘째는 베드로 사도가 고기잡이할 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을 때”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히자 베드로가 했던 말입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가 주십시오” 이 말은 나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 줍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성찰하게 합니다.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셋째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을 때 했던 고백입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양들인 ‘너’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돌보아야 할 주님의 양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보아야 할까요?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 가운데 세 가지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아버지는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가 관계 안에서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내용들입니다. 그분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 나를 예배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닮고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내어주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나도 내어주는 삶을 살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나를 내어줄 때 부활하신 주님의 영과 영의 거룩한 활동을 경험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용서하기 위하여 힘을 포기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전능한 힘을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겪으신 가장 큰 유혹이었습니다. 채찍질과 모욕과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인간으로서 얼마나 그 힘을 사용하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그분은 그 힘을 내려놓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전능한 힘으로 사람을 살려내는 데 그 힘을 사용하셨습니다. 힘을 포기하는 사랑은 우리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선이 흘러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즉 내려가는 죽음과 내려놓는 죽음과 허용하는 죽음과 놓아주는 죽음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관계의 혁명을 불러옵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의 현장에는 이러한 죽음이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하는 신앙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해 응답하는 신앙은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경험합니다. 죽으면서도 죽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의 현장은 성체성사 안에서 구체적 현실이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를 내어주었듯이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단절된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것이 관계 안에서 나를 내어주는 구체적 현장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믿음은 관계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선이 흐르게 함으로써 서로에게 기쁨과 자유를 얻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내어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2023, 4,26일 마르첼리노 마리아 O.F.M.
영명축일에 미사 강론을 부탁받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