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신비는 내어주는 몸과 받아들임의 신비 (성삼일의 묵상)
최후 만찬과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예수께서 보여주신 행동하는 자비는 계시의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성부께 자신의 자유를 내어 맡겼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 전부를 내어주신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부활은 내어주는 몸과 받아들임의 상호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최후 만찬에 앞서 말씀하신 새 계명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삶의 실재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은 내어주는 사랑과 받아들이는 사랑을 통해 부활의 신비를 관계 안에서 경험하도록 이끌어주신다는 말입니다.
나의 자유를 내어 맡긴다는 말은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성장하게 하려면 간직된 말씀이 있어야 하고, 간직된 말씀이 있을 때 말씀에 따라 행동할 수 있으며 관계의 밭에 묻힌 보물을 얻기 위하여 나의 가장 소중한 자유와 의지를 내어놓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신비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자기 비움과 충만한 삶, 내어줌과 받아들임, 상실과 회복, 죽음과 부활, 어둠과 빛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이와 같은 패턴은 관계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이와는 정반대의 현실을 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죽음 없는 부활이고, 의구심이 없는 답이며, 어둠이 없는 빛이고, 과정이 없는 결론입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비현실의 세계로 도망치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쾌락과 목적 없는 고통의 악순환이 여기서 생겨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따라 실천하는 과정에서 깨닫는 것은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곧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서 동반하시고 부축해주심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 구원자)를 발견하고 알아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내면의 교정자로 일하시는 경험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하시고 깨달음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이끌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과정의 진리를 통해 배우는 선(善)입니다. 나를 통하여 관계 안에 선이 흘러가게 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선에 참여합니다. 이 참여가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지금 여기로 옮겨놓습니다. 상처를 주는 관계에서 치유해 주는 관계로 변모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 사랑을 받게 되면 내가 변하고 내가 변하면 관계가 변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랑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확신에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내어주는 몸, 쏟는 피의 현장에 부활이 있습니다. 너를 받아들이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너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자신의 자유를 아버지의 손에 내어 맡김으로써 내어주는 몸으로 자신을 내어놓게 됩니다. 부활의 신비는 내어주는 몸과 받아들임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나로부터 시작했기에 구원이 나의 노력에 따라 저절로 따라오는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공로에 대한 대가로 사후 처벌과 보상이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무수한 기도와 희생과 재물을 바치고 계명 준수에 철저히 매달렸습니다. 인과응보의 가치를 배우면서 그것이 가장 훌륭한 가치라고 여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윤리와 도덕적 성취의 척도가 가치를 재는 기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하느님을 알지 못했고 자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점 바꾸기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은 인과응보의 틀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틀로 인간과 하느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느님을 벌주시는 하느님으로 만들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이와는 달리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은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곧 우주 만물을 무한한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적 사랑으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하느님은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느님으로서 발을 씻어주시는 하느님이시며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가차 없이 처벌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기회를 주시고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셨습니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가15장)가 말해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내어주는 사랑은 내려가는 사랑과 내려놓는 사랑, 허용하고 놓아주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이 말이 나에게는 죽음의 실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생명을 다시 얻는 부활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단절된 관계의 회복은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내어주는 사랑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야고2,12)이 구원하는 법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꼭대기에서 내려가야 하고, 용서하기 위해서는 집착하던 것들과 힘을 내려놓아야 하며, 용서하기 위해서는 저마다 제 몫의 삶을 살도록 허용하고 놓아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견디실 때 겪으신 가장 큰 유혹은 자신이 하느님의 힘을 지니신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모욕하고 매질하고 못 박을 때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싶은 인간적 유혹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전능한 힘을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하셨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힘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나에게 해로운 말이나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즉시 모든 힘을 다하여 상대방을 헤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을 느낄 때,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나의 몸이다.” (마르 14,22-24)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요한10,18) 예수님의 죽음을 인간이 저지른 죗값에 대한 대속적 형벌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습니다. 사랑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행동양식입니다. 내어주는 몸이 상징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면서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성목요일과 성금요일의 전례를 통하여 바라봅니다. 내어주는 몸과 받아들이는 자유를 통해 관계 속에 선이 흘러갑니다. 부활의 신비를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가 거기에 있으며 성부로부터 계시 된 구원의 완성을 거기에서 봅니다.
내어주는 몸과 받아들이는 관계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부활의 신비를 신앙의 신비로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가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