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Navigation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조회 수 246 추천 수 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하느님의 무상성(빚의 탕감)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 18,22)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마태 18,24)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마태 18,27)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마태 18,32-33)

 

선을 어둡게 하는 헛된 환상 속에서 저지른 단절로 허물어진 우리의 관계는 내면에 심각한 외로움과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는 실존적 공허를 남겨 놓았다. 용서는 탕감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자비다. 자신의 힘으로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은 다른 사람 위에 자신을 올려놓음으로써 관계의 균형을 깬다. 균형이 깨지면 용서하기가 불가능하다. 용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일이 아니라 동등하거나 아래에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탕감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무상으로 받은 선물이기에 경험된 지식으로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는 대가를 치르고 받은 게 아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바리사이적인 생각들이 용서를 어렵게 한다. 용서는 업적과 공로에 따른 보상이 아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자신의 업적과 공로와 맞바꿀 수는 없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상거래를 하자는 것이다.

 

용서는 일상적인 잘잘못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존재론적 기반을 둔 경험된 지식에서 나온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우리는 세례를 통해 연결의 기초를 놓았으며 이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존재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었던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으며, 나만 좋으면 된다는 악습과 나만 챙기겠다는 생각과 행동으로 야기된 단절의 죄 또한 교회의 성사를 통하여 용서받고 있다. 여기에는 관계의 대면이 있다. 너와 나의 대면과 사제와 나의 대면이 있다. 대면이 없는 용서는 빚문서를 없애지 못한다. 대면을 미루는 것은 빚문서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탕감은 언제나 대면으로 이루어진다. 존재적으로 용서받은 경험은 아버지의 자비가 우리가 저지른 허다한 죄와 허물의 빚 문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아 완전히 없애버리셨다는 결과에서 나온다. 용서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시작되는 데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존재들이 되었다. 완전한 용서를 받은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가 객관화된 지식만 있고 경험된 지식이 없는 것은 존재론적 성찰보다 눈앞에 놓여있는 죄만 바라보고 선물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단절된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하게 하셨다.” (로마 5,12-21)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로마 5,15-17)

 

자비를 입은 사람이 자비를 행한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한 자들이 자신에게 잘못한 이에게 자비를 경험하도록 돕는 사랑이다.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사랑이다. 자비를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은 용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만약 그들이 용서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기도와 희생과 제물과 재능의 봉헌을 용서와 바꿀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느님과 상거래를 하려는 듯이 그렇게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느님께 미루고 많이 바치고 잘 지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부탁을 들어 주실 것처럼 산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줘요, 다신 안그럴께요, 이런 말들은 우리가 대면해서 해야 할 말이지 하느님이 하실 말인가? 그러나 하느님에게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면서 자신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바치는 데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용서는 자신의 변화부터 시작된다. 내려가는 변화와 내려놓는 변화와 허용하고 놓아주는 내면의 변화로부터 관계의 변화로 나아가는 점진적 변화의 길이다. 빚을 탕감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많이 받으면 많은 것을 내어놓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은 응답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인과응보의 덫에 걸려 하느님과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보게 된다. 인과응보의 잣대와 저울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심판하면서 자신을 끝없이 높이는 것이다. 스스로 높이고 과장하고 포장하고 의롭고 거룩하다고 여기는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이다. 잘 지키면 잘 지킬수록,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더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잘못한 이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복수와 앙갚음의 칼을 갈고 있으면서 기회만을 살피는 것이 아닌가? 성서에 나타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거룩함과 의로움의 감옥에 갇혀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잘못을 저질렀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셨습니다.

(골로2,12-14)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마태 18,32-33)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자유나눔 게시판

자유롭게 글을 남겨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93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느님의 여성성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느님의 여성성   너무나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진리를 따라 살기보다는 사교클럽 삼아 다니거나 인간 ... 이마르첼리노M 2024.03.21 277
1392 창조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창조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창조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신을 내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아름다... 이마르첼리노M 2023.08.31 279
1391 사랑하는 자는 사랑 받는 자 안에서 기뻐한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 받는 자 안에서 기뻐한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서 프란치스코의 인간성 안에서 삶의 방식을 배워... 이마르첼리노M 2021.11.27 280
1390 관계적 진실은 실존과 정체성의 비밀을 푸는 열쇠 관계적 진실은 실존과 정체성의 비밀을 푸는 열쇠   성체성사는 관계성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 되었다. 사랑하기 위하... 이마르첼리노M 2022.08.21 280
1389 신적 생명에 연결된 자유 신적 생명에 연결된 자유     하느님의 가난과 자기 비움을 배워야 나 자신을 온전하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내어 맡길 수 있다. (필립 2,6-12) 선은 위험을 감수... 이마르첼리노M 2022.11.20 280
1388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서 있습니다. 송년과 새해가 만나는 시간에 창조된 세계에서 새로운 창조를 바라봅니다.   우리를 위해 세... 이마르첼리노M 2021.12.31 281
1387 성주간 (계시의 완성을 보는 때) 성주간 (계시의 완성을 보는 때)   자비를 깊이 바라보다가 자비가 되어 자비가 흐르도록 길을 떠나는 때   자비의 열매는 나의 필요성을 없앤다. 스스로 높일 ... 이마르첼리노M 2023.03.29 281
1386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힘의 원천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힘의 원천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려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정신이... 이마르첼리노M 2023.08.20 282
1385 일상의 축복에 반응하는 기도 저는 로버트 제이 윅스의 책, No Problem(문제가 아님을 향해) 을 대충 번역하며, 우리의 영적 여정에 대한 접근을 하고자 합니다. 책의 내용과 함께, 저의 이어... 김상욱요셉 2023.07.10 283
1384 프란치스칸 회개의 삶 회원피정 시작기도 시작기도 (프란치스칸 회개의 삶 회원피정)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형제 O.F.M. (전주 다가, 익산 창인, 남원형제회 2023, 6,17-18 천호 피정의 집)     언제... 이마르첼리노M 2023.06.09 287
1383 4. 내적 단순성의 힘 깨닫기 4. 내적 단순성의 힘을 깨닫기 우리는 생애 전반에서 그리고 하루 생활에서도 수많은 활동들을 하고 다방면으로 이끌림을 경험하는데, 그 가운데서 우리 대부분은... 김상욱요셉 2023.08.05 288
1382 8. 내려놓음(letting go)의 영성 8. 내려놓음의(Letting go) 영성 우리가 삶의 다른 단계들을 통과할 때나 삶의 자연적이지만 예견하지 못한 모퉁이를 돌도록 초대되었을 때, 새로운 관점에 열려 ... 김상욱요셉 2023.09.09 289
1381 무엇을 구원이라고 믿는가? 무엇을 구원이라고 믿는가?   내 믿음의 토대는 인류 구원에 대한 속죄 이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론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참여... 이마르첼리노M 2023.02.14 291
1380 닮아가는 삶에 희망이 있다. 닮아가는 삶에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의 주된 관심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가까이서 본받고 닮으려는 데 있다. 성프란치... 이마르첼리노M 2021.11.16 292
1379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변화의 길 (1)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변화의 길 (1)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마태12,48) “믿는 영혼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마르첼리노M 2021.10.14 293
Board Pagination ‹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00 Next ›
/ 100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