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동정 마리아께 드리는 인사(Saluto alla Vergine, 2010)
작 가 : 쥬스티나 데 토니(Giustina De Toni, 1970-)
크 기 : 목판 유채
소재지 : 작가 개인 소장
많은 수도회 창설자들은 성모 공경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는데 성 프란치스코 역시 각별한 신심이 있었기에 십자가를 든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성모상을 특별히 강조하기도 하셨다.
성인은 성모님을 좋으신 예수님을 우리 인간들에게 형님으로 주신 어머니로 칭송하시면서 프란치스칸 평등성에 기본을 둔 형제성을 강조하기도 하셨다.
작가는 성인이 성모님을 기리기 위해 지으신 송가에 감동되어 이것을 9장의 연작으로 아시시에 있는 포르치운쿨라 수도원에 있는 미술관에서 발표했다,
포르치운쿨라 수도원은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처음 수도 생활을 시작한 요람과 같은 곳인데, 이 역사적인 자리에서 작가는 예술가로서 산뜻한 성모 신학을 제시했다.
작가는 자기 일생에서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추억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었다.
작가는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성 안토니오 성인을 위한 대성당이 있으며 프란치칸 신심의 여러 자랑스러운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며 이곳을 지키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칸 형제들에 의해 참으로 자랑스러운 성지의 성격을 증거하고 있으며 예술 출판의 관점에서도 대단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전에는 아름다운 대성전에서 전례 무용 공연도 할 만큼 크리스천 삶의 새로운 경지를 보이는 과감한 시도도 하고 있다.
작가는 이런 전통 속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성지와 가까이 지내면서 자신의 예술 표현 역시 예술을 통해 성모님의 모습을 재해석하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작가는 구약의 아가서에 등장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 신혼부부들에게 볼 수 있는 뜨겁고 열렬한 관계성을 관능적이면서도 신비적으로 표현한 것에 크게 공감하면서 이것을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드러내었다.
한마디로 성모님의 동정성을 순결이라는 차가운 관점에서보다 아가서처럼 열렬한 사랑 표현의 관점에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상념을 깨트리는 혁신적 표현을 했다.
이 찬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부인이요 거룩한 여왕이시여, 인사드리나이다.
하느님을 낳으신분,
거룩한 마리아이시여,
당신은 교회가 되신 동정녀이시나이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뽑으시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보호자이신 성령과 함께 당신을 축성하셨나이다.
당신 안에는 온갖 은총과 온갖 선이 가득하였으며
지금도 가득하나이다.
하느님의 궁전이시여, 인사드리나이다.
하느님의 장막이시여, 인사드리나이다.
하느님의 집이시여, 인사드리나이다.
하느님의 의복이시여, 인사드리나이다.
하느님의 여종이시여, 인사드리나이다.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인사드리나이다.
그리고 거룩한 모든 덕들이여, 당신들에게도 인사드리나이다.
성령의 은총과 비추심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에 당신들이 쏟아부어지면
하느님께 불충한 이가 충실한 이 되리이다.
중세기 배경에서 지어진 이 찬가는 최고의 대단한 수식어와 최상의 어휘를 성모님께 돌리고 있다.
궁전, 장막, 여왕 등 최고의 칭호를 부여했기에 지금까지 이 작품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장식 왕관과 중세기의 최고급 안료로 여겼던 감청색을 사용해서 성모님의 위상을 한껏 높였으며 이런 성모님의 위상에 걸맞게 성모님의 모습 역시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었기에 성모님에게는 최상의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당연한 모습이었다.
이런 성모님의 모습이 결국 동정녀라는 표현으로 귀결되었다.
즉 성모님이 동정녀이시기에 이런 영예와 영광은 합당하다는 것이었다.
성모님의 동정성에 대해 교회는 평생 동정이라는 단어로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으셨으나 성적으로 순결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것은 성서 신학의 발달로 서서히 의문시되고 있다,
현대에서는 성모님의 동정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성서적 바탕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오죽했으면 현대 보수적인 신학의 대변인 역할을 하셨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하느님의 이들이신 예수님의 성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성의 표현과는 다른 것이다.”
이럴 때 성모님의 동정성 역시 생물학적 차원으로 해석하는 것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우리는 보통 성모님의 동정성을 편협하게 알아들을 때 성모님은 성관계하지 않고 아들 예수를 잉태하신 것이 핵심으로 여기기에 이것을 통해 기혼자와 수도자가 구분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부부생활을 하는 사람과 부부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의 차지는 성모님의 동정성의 증거에서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본의 아니게 지금까지 교회는 성모님을 닮기 위해선 성이 동반된 부부생활을 하지 않는 수도자가 훨씬 더 우위라는 실재적 견해가 지배적이며 성생활을 동반한 부부생활은 어쩔 수 없이 이등 신분으로 머물러야 했다.
이런 어정쩡한 견해가 이미 성서 신학자들에 의해 이제 사전적인 표현에서 명확히 표현되고 있다.
1984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 신학 사전 124쪽에 “동정성(Verginity)은 교황님의 말씀처럼 생물학적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심원하고 정확한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전갈을 받았을 때 그 말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시고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예수의 어머니로서 그분 삶의 동반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성모님은 주님께서 가시는 어디나 따라다니시며 이것이 그분의 십자가 여정과 같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증거하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불안에 빠진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을 받는 순간에도 함께 하시어 새로 시작되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파할 사도들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 바로 성모님 동정성의 진면모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가 성모님의 동정성을 너무 편협하게 알아듣게 된 이면에는 그동안 성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닌 오류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성모님의 동정성에 대해 언급하는 성서 구절은 이사야 7장 14절과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 1장 23절이 있는데,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 7,14)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 1,23)
이렇게 성서의 두 부분에서 젊은 여자와 동정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 사용했던 언어의 차이에서 왔다.
이사야서는 히브리말의 젊은 여자라는 단어 알마(Alma)를 사용했지만 마태오 복음사가는 당시 유행하던 그리스의 표현인 파르테노스(Parthenos)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동정녀로 표현했다.
희랍 신화에서는 여신이 무성생식으로 출산했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 마태오 복음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 역시 자기들이 믿는 구세주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임을 제시하기 위해선 이런 그리스 언어에서 정착된 동정녀라는 표현이 훨씬 더 적절했기에 동정녀라는 말이 교회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던, 당시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너무도 익숙했던 그리스 여신들에 등장하는 무성생식의 이론으로 예수 탄생에 접근하는 것은 당시 수준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오늘날 교회는 성모님의 동정성을 성모님의 생물학적인 성과 연관시키지 않으나 아직 이것이 교회 안에서 암묵적인 정서로 남아 있어 부부 생활을 하지 않는 수도자가 기혼자들보다 더 거룩하다는 생각에 머무는 답답한 현실을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초대 교회 성서 번역가들의 시대착오적인 번역의 진짜 의미를 바로 이해함으로써 성모님의 동정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해야 하고 작가는 바로 이런 면에서 탁월하고 예언적인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성모님이 우리와 꼭 같은 여인으로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시면서 바로 여느 여인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적인 기법에서 항상 성모님에 적용하던 감청색을 과감히 극복하고 인간성의 색깔이 붉은색을 전체적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성모님의 모습 역시 고상하고 고귀한 것과는 거리라 먼 길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여인의 모습이며 그 표정을 보면 힘든 삶을 사는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여인에게 유일한 삶의 존재성은 자기 아들을 안고 있다는 것이 전부이며 이것만이 전통적인 성모상과 일치되는 유일한 모습이다.
성모님의 동정성을 신체적인 동정성으로 이해하는 표준으로 생각하면 이 작품은 어떤 어려운 처지의 여인이 아들을 안고 있는 작품에 불과하나 작가는 이 여인의 모습을 성모님의 모습으로 제시하면서 사랑으로 점철된 어머니가 지닌 모성을 바로 성모님 동정성의 핵심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독신과 기혼의 모두를 통합할 수 있는 동정 성모의 성서적 모습이 제시된다.
기혼자라도 하느님의 사람을 몸으로 살아가면서 가정과 자녀들을 돌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동정 성모님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성모님의 동정성은 모든 여인을 다 통합할 뿐 아니라 성모님의 동정성은 성당이나 수도원에서뿐 아니라 평범한 우리 가정, 우리 어머니들을 통해 증거되는 참으로 평범하면서도 고귀한 덕행이 될 수 있다.
근래 이런 표현으로서 작품이 여러 작가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교회 쇄신의 밝은 면으로 볼 수 없다.
우리 교회는 어느 종교보다 더 제도적이며 법적인 관점을 지닌 종교이다.
이것은 좋은 면도 참으로 많지만 아쉬운 면이라면 바꾸어야 할 것을 빨리 바꾸지 못하고 신학 역시 지리멸렬한 이론을 반복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실망을 주는 안타까움을 볼 수 있다.
전통 미술의 성지와 같은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고향인 아시시를 오가며 그가 남긴 작품은 하나같이 오늘 교회가 건너야할 강을 과감히 건넌 사람의 용기 있는 작품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작품을 과감히 전시할 수 있는 예술인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너무 자랑스러운 일이며 이들의 과감한 예언성은 교회의 희망이기도 하다.
이 동정성의 바른 표현은 과거 교회가 제작했던 요셉 성인상의 모습도 변화시킬 수 있다.
성모님의 동정성을 너무 일방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과거 요셉 성인의 모습이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색한 희극적 모습이 되었다.
오늘 요셉상은 아래와 같은 건강하면서도 매력적인 요셉 성인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이 요셉 작품은 르네상스 예술의 창시자였던 피렌체 메디치 집안 무덤이 있는 피렌체 성 로렌죠 성당에 있는 현대 작가 피에로 안니고르니르크 )Piero Annigonirk) 의 작품이다
이 무덤에는 미케란젤로의 걸작인 밤과 낮이란 조각이 있는데, 밤은 고뇌하는 모습의 여인, 낮은 사색하는 모습의 남성의 모습으로 묘사된 풀라톤 철학의 걸작이 전시된 공간인데 이 작가의 작품은 참으로 이 대성당 격에 어울리지 않은 만큼 초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성당은 오늘 교회에 있는 시대착오적인 성 요셉의 모습을 교정할 수 있는 이 작품 전시를 예언자의 눈으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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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에 있는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 없는 요셉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너무 좁게 믿고 있는 성모님 동정성의 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 작품은 참으로 시원한 모습이다.
다행이 근래에 와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거의 일방적으로 보일 만큼 요셉 성인의 신학을 강의하는 것은 참으로 경괘하고 밝은 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