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죽음앞의 평등(1848)
작 가 :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William-Adolphe Bougeureau:1825-1905)
크 기 : 캠퍼스 유채 (281 X 225cm)
소재지 : 프랑스 파리 오르세(Orsey) 미술관
중세 유럽 미술의 중심지는 이태리 피렌체였다가 그 후 로마로 옮기게 된다. 문화와 예술에 대단한 혜안이 있던 교황들이 예술을 후원하면서 오늘 로마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근세에 들어오면서 예술은 프랑스 파리로 옮겨져 오늘까지 파리는 세계 예술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여기에 큰 역할을 한 작가가 바로 윌리엄 아돌프 부로였다.
작가는 프랑스 아카데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였고 신 고전주의 작가로 엄격한 형식을 바탕으로 여성 신체를 주로 신화적 요소나 종교적 요소를 너무도 아름답게 그림으로서 프랑스와 미국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으면서 그의 작품은 완성되기가 무섭게 파격적인 가격으로 팔려 나가는 행운의 작가였다.
그러나 여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철학이 부족하고 너무 틀에 짜여 답답하다는 불평을 듣기도 했으나 그의 작품은 아름다움의 묘사로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로마에 가서 르네상스 시대 작가였던 이태리 거장들의 작품을 섭렵하여 그의 독창적인 모습으로 재현해서 이것이 당시 대상으로 평가되던 로마 대상을 받음으로 그의 작품은 유럽 예술가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이 되었다.
특히 그는 1860년에서 70년대에 많은 상을 받아 신화적 주제 와 인물화 뿐 아니라 파리의 여러 성당에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 작품은 예외적으로 두 명의 남자를 등장시킨 작품이다.
”죽음 앞에 평등“이라는 주제는 인간 삶의 필수 조건인 죽음이라는 주제를 종교화의 영역 보다 인간적인 영역으로 확대함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교훈적 성격이 강조되었다.
죽음은 종교의 영역에서 다룰 때 최후심판, 천국, 지옥 구원과 멸망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나 작가는 죽음에 있어 종교의 영역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의 결말인 죽음이라는 관점을 평등이라는 주제로 접근했기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죽음이라는 자신의 가장 확실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죽음 앞에 평등”이라는 주제를 달고서, 죽고 나면 생전의 삶이 착했는지 아닌지는 무의미해진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것은 교회가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구원과 멸망 천국과 지옥이라는 좁은 한계를 벗어나 죽음은 크리스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임을 폭넓게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평등이라는 주제는 작가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민과 노동자들의 2월 혁명을 시작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제2 공화정이 성립되면서 민중들이 대단한 열광을 하고 있던 주제였다.
작가는 종교의 가르침과 무관하게 사회 전체가 열광하고 있는 이 주제를 죽음과 접목시킴으로 죽음의 종교성을 사회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야처럼 황랑한 벌판에 젊고 건장한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반듯이 누워 있다. 그 주위에 어떤 인위적 건물이나 자연의 묘사도 없는 것은 죽음이란 어떤 죽음이던 철저히 개인적인 사건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젊은이 위에서 역시 젊은 천사가 죽은 젊은이를 덮을 천을 들고 젊은이 위에 있다. 그러나 천사나 젊은이나 시선을 전혀 다른 방향을 응시함으로서 둘은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이란 오로지 자기 혼자 감당해야 할 몫임을 알리는 것이다.
천사는 다만 젊은이의 벗은 몸을 가려 줄 천을 준비한 게 전부이다. 청년은 전통적인 화법에서도 금기로 여겨졌던 성기 부분도 확실히 드러낸 모습인데 이것은 인간은 죽음 앞에 아무것도 감추거나 꾸밀 수 있는 게 없다는 실존적 현실을 알리고 있다.
그동안 여러 작가들이 인간의 죽음 앞에 볼 수 있는 평등성을 알렸으나 이 단순한 구도의 작품만큼 감동적이면서 충격적으로 남긴 것은 없었다. 벗은 젊은이의 나체는 성적인 욕구나 호기심을 부추기는 나체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확한 모습의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작품은 크리스챤으로서 성서의 관점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데 먼저 죽음은 인간 삶의 가장 확실한 현실이기에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얼이 나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날로 그의 모든 계획도 사라진다.”(시편 146,4)
그러면서 죽음이란 한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는 가장 확실한 계기이기에 신앙의 차원에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으며 구약 지혜서인 집회서는 특히 이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끝이 좋고 죽음의 날에 복을 받으리라.”(집회 1:13)
“죽음은 더디 오지 않고 저승의 계약은 너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여라.”(집회 14:12)
그러면서 교회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죽음으로 인생은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임을 알리며 다만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인 천국과 지옥과 같은 편협함에 묶여서는 않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사실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이 너무 편협하기에 현대 세계에서 관심을 끌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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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 즉 심판과 영벌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현대인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죽은 이를 위하여 울어라. 빛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를 위하여 울어라. 슬기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이를 두고는 그리 슬퍼하지 마라. 쉬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의 삶은 죽음보다 고약하다.”(집회 22:11)
현대에 와서 교회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죽음을 크리스챤 전통의 구원과 영벌에 접목시키는데 대한 식상한 분위기와도 연관되고 있다.
즉 종교적 교훈의 정확성을 편협함으로 표현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큰 매력이 없다. 종교가 이제 신 중심의 사고방식과 규율을 뛰어 넘어 인간적인 현실에 접근했을 때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인 구원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새로운 복음화를 바라는 현대인들에게 좋은 성화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들이 너울거리는 천국이나 염라대왕이 득실거리는 지옥도와 같은 죽음 묘사에 식상한 현대인들에게 작가는 참으로 설득력 있는 크리스챤 죽음의 매력적인 실상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