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 왕 (Saul attacking David : 1646)
작 가 : 구에르치니 (Guercini :1591-1666)
크 기 : 캠퍼스 유채 147X 220cm)
소재지 : 이태리 로마 고전 미술관
작가는 이태리 북부 부유한 도시인 볼료냐 근처에서 태어나 문화 예술적으로 풍요로운 전통이 있는 지역의 영향을 바탕삼아 거의 독학으로 수학해서 그 지역 최고 화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작가는 일생을 통해 작품의 대종을 성화로 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화가의 자리를 지켰다.
화려한 색감에 극적인 빛의 효과와 강한 감정 표현을 결합시켜 서정적이면서도 힘이 넘치는 바로크 미술을 탄생시킨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두 개의 상반된 모습을 선성의 상징인 다윗과 악성의 상징인 사울 왕을 등장시켜 감동적인 시각적 설교를 하고 있다.
작품은 성서의 다음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다윗은, 사울이 어떤 임무를 주어서 보내든지, 맡은 일을 잘 해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온 백성은 물론 사울의 신하들까지도 그 일을 마땅하게 여겼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고 군인들과 함께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소구와 꽹과리를 들고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사울 왕을 환영하였다. 이 때에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 이 말에 사울은 몹시 언짢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들이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만을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더 돌아갈 것은 이 왕의 자리밖에 없겠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 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다음날, 하느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에게 내리 덮치자, 사울은 궁궐에서 미친 듯이 헛소리를 질렀다. 다윗은 여느 날과 같이 수금을 탔다. 그 때에 사울은 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다윗을 벽에 박아 버리겠다고 하면서, 다윗에게 창을 던졌다. 다윗은 사울 앞에서 두 번이나 몸을 피하였다. 주께서 자기를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안 사울은, 다윗이 두려워졌다. 그리하여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으로 임명하여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였다. 다윗은 부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주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그는 항상 이겼다. 다윗이 이렇게 큰 승리를 거두니, 사울은 그것을 보고, 다윗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이 늘 앞장서서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그를 좋아하였다. (사무엘상 18:5-16)
작가가 그린 사울 왕은 왕관을 쓰고 갑옷을 입고 있다. 이것은 사울왕의 너무도 막강한 현실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대적하기 힘든 막강한 인간의 상징이나 그의 얼굴은 찌부러지고 눈빛에는 불안함이 서려있다.
한마디로 그가 입은 안정성의 상징인 갑옷과는 전혀 다른 불안한 심사를 표현하고 있다. 혹시나 임금의 자리를 다윗이 차지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사울이 오른손으로 힘 있게 들어 올린 창끝은 날카로우며, 시기하는 마음은 창끝을 경쟁자인 다윗의 얼굴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의 얼굴은 사울과는 대조적으로 청순하기만 하다. 그는 수금을 들고 밖으로 급하게 달아나고 있다. 그는 사울 왕과 전혀 다른 무방비 상태의 인간이나 흉포한 사울 왕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분노도 표현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는 곳은 왕궁이 아니라 큰 기둥이 있는 성전이며, 맑고 푸른 하늘은 다윗의 머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어 그를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다윗은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사울왕의 광기 앞에서도 너무도 평안하다. 사울왕이 살인의 도구인 창을 들고 노리는 반면 다윗은 평화의 상징인 수금을 들고 있으나 그 표정은 너무 평온하게 보인다.
사울 왕은 생명을 살상하는 창과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있는 갑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얼굴은 더 없이 불안한 모습이다. 작가는 이 두 인물을 한 자리에 배치해서 우리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있도록 배려했다. 나의 현실이 지금 사울 왕인지 아니면 다윗인지?
이 정확한 성찰을 돕기 위해 그들은 성전을 배경으로 서 있게 만들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왕궁이 아니라 큰 기둥이 있는 성전이며, 맑고 푸른 하늘은 다윗의 머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음 시편은 이런 다윗의 마음을 너무도 잘 표현하는 기도이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기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내 살을 먹으리라 달려들던 악한 무리 나의 적 그 원수들이 비슬비슬 쓰러지니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은 겁내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싸움이 일어도, 오히려 나는 든든히 믿으리라.
오직 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의 성전을 우러러 보며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이어니
불행한 날 이 몸을 당신 장막에 숨기시고 그 장막 그윽한 곳에
나를 숨겨 두시리라 바위위에 덩그렇게 올려 두시리라”(시편 26 : 1-5)
우리의 대인관계에서도 이런 관계가 자주 설정된다. 다윗처럼 질투의 목표물이 되어 고민하는 것도 될 수 있고, 사울 왕처럼 질투의 대상을 내 맘에 둠으로 스스로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울왕의 모습은 어떤 이유로던 내가 질투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어떤 이유로든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칠 유혹에 빠져 있을 때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 다윗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사울 왕은 자기의 악함 때문에 다윗에게 복수를 당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비극적인 인생을 마치게 된다.
성서는 사울왕을 비극적 인생을 마친 것으로 만든 원인 제공인 질투의 해악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티토 3,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잠언 14,30)
“질투와 분노는 수명을 줄이고 걱정은 노년을 앞당긴다.(집회 30,24)
“분노와 질투와 고난과 불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격노와 분쟁에 싸여 있다. 자리에 누워 쉬는 시간에도 한밤의 잠이 그의 의식을 혼란케 한다.”(집회 40,5)
그런데 사울 왕과 다윗의 관계는 질투만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고 해치고자 하는 모든 인간적 악행에 대한 경고를 주고 있다.
그러기에 크리스챤들은 어떤 경우에도 항상 선에 대한 집념 속에 살면서 악한 사람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선에의 희망으로 살아갈 것을 이 작품은 다윗을 통해 가르치고 있다.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어떤 자매님의 기도를 부탁받았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그 자매의 딸이 사악한 학부모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로서 너무도 선한 삶을 살았던 이 자매는 이런 어려움을 처음 당해본 처지에서 엄청난 고통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이런 악한 세력의 피해자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다윗을 생각하면 위안을 받으며 고통 속에서도 찌부르지지 않고 용기로서 버티면서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어떤 경우라도 사울 왕처럼 되어선 안 된다는 경각심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
주의 기도의 마지막처럼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