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증인으로서의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1963)
작가 : 앙드레 부똥 신부 Andre Bouton .O.S.B(1914- 1980)
크기 : 켐퍼스 유채 : 270X 500cm
소재지 대전 대흥동 주교좌 대성당
교회 역사가 일천한 우리 교회는 다른 나라에서 보기 대단한 교세 성장과 교회의 생기있는 모습에 비겨 성미술에 있어서 독창성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아쉬운 면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종교자유를 얻으면서 시작된 한국 교회는 자기들의 시각에 익숙한 고틱 양식과 유럽 교회에서 정착된 형태의 성상이나 성화가 대종을 이루는 것이었고, 한국적인 특성이 처음으로 표현된 것은 운보 김기창 (1913- 2001) 선생이 육이오의 어려움 속에서 자기 인생과 신앙을 정립하는 마음으로 그린 30점의 “예수의 일생”이 시작이었다.
그는 당시 한국 전쟁으로 열악한 삶을 살아야 했던 현실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예수의 일생도를 그렸다. 어려서부터 개신교 신자였던 그는 예수와 당시 등장인물, 배경을 모두 한국인과 한국 복식, 배경으로 바꾸어서 성경의 내용에 따라 30 점을 그렸다.
신앙에 투신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으며 이것은 성미술을 우상 숭배의 차원으로 오해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의 풍토에서, 더욱이 미국이 그리스도교의 본원지로 여겨 , 이 땅의 문화와 습속을 타파해야 할 악마적 미신으로 치부하는 개신교 풍토에서 한국적인 복식과 등장인물을 이 땅의 얼굴로 표현한 것 만으로도 대단한 시도로 볼 수 있다.
개신교 신자였던 김기창 화백의 부인이 막내 딸을 임신했을 때 참으로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그 딸이 개신교 신자로서 이해하기 힘든 수녀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고 이것을 이상히 여긴 작가는 이 꿈을 작품으로 남겼다.
참으로 놀랍게도 이 딸은 장성해서 가장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사랑의 선교회 수녀가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작가도 1985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 작품은 지금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모영보: 예수의 일생 중에서)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1957년 현재 바티칸 미술관 소장)
그 외 우리 가톨릭 측으로는 명동 대성당 제대 부분의 12사도상을 제작하고 또 앞에서 소개한 칠락묵주 성모님을 제작한 루이스 장발 선생이 거의 독자적 위치에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베네딕도 회원으로서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와서 이 땅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고 제작한 좀 특이한 면이 있는 작품이다. 안드레아 부통 신부는 1934년 프랑스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한 후 2차 대전 중 모로코와 성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중동 예술과 문화와 함께 ,특히 성서를 예수님이 사셨던 땅에서 공부하셨기에 화가이기 이전 예수님의 삶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아니라 생동감 있는 이해를 키우게 되었다. 한마디로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진과 선의 차원에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왜관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오셔서 당시 한국 교회 건축의 구심점 역할을 하신 알빈 신부님과 함게 교회 미술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1966년부터 1970년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전국 여러 성당에 벽화를 제작했고 여기 소개하는 대전교구 대흥동 주교좌 성당의 벽화도 부통 신부 작품이다. 야수파적인 강렬한 색채를 주로 사용했던 부통 신부의 특징은 대흥동 성당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얀 벽면에 그려진 강렬한 색상은 성당 공간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당시 대전교구는 주교좌 대성당을 신축하면서 항상 진취적인 사고와 행동 방식을 지닌 사목자였던 오기선 (요셉) 신부님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던 몇 분의 작가들을 모아 성당을 현대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시 교회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남겼던 붉은 벽돌의 뾰쭉당 사고의 수준을 반복하는 것이었는데, 오늘에도 새롭게 보이는 성당을 건축했다는 것은 대단한 앞선 사고의 표현이었다.
문제는 이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성미술이 과제였다. 대전 교구 측으로부터 성미술의 요청을 받은 작가는 텅빈 큰 공간처럼 느껴지는 이 성당을 하느님의 숨길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부똥 신부님은 대흥동 작품을 마치신 후 본인이 있던 프란치스코 정동 수도원의 제단화도 제작하셨기에 가까이서 신부님의 작품 제작을 지켜 볼 기회가 있었으며 그때 신부님을 만난 기억이 큰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다.
성미술에 문외한이었던 본인의 시각으로도 신부님이 제작하신 대흥동 성당의 작품은 생소하며 불교 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사천왕의 이미지가 연상되어 성미술에 대한 의문으로 닥아왔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다듬어진 아름다운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는 개성이 강하다 못해 접근이 어려울 만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모습이어서 정동에서 작품을 제작하시는 신부님의 의견을 들었다.
여기에 대한 그분의 견해는 확고하며 자기의 신앙 표현이었다. 성서의 예수님이나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에게 익숙한 예수님처럼 유순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기에 우리의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분은 강조하셨다.
그분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진면모를 전해야 한다는 선교사의 마음으로 작품을 제작하신 것이 이해가 부족한 우리 신자들에게는 불편으로 다가오게 된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던 왜관 대목구를 중심으로 여러 성당에 작품을 남겼으나 항상 문제로 다가온 것은 바로 전통적 성화에 익숙한 신자들로부터 받는 편치 않는 인상이었다.
이 작품은 대성당인데다 대작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는 관계상 성미술에 대한 좁은 이해를 가진 정서에 의해 구설수에 오르다가 1970년 경 이유를 알 수 없는 동기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후 전국에 흩어져 있던 부통 신부님의 작품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되거나 철거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 작품만이 아니라 본인이 머물고 있던 정동 수도원 제단화 역시 철거되면서 작가는 큰 마음의 상처를 안고 본국으로 귀국해서 세상을 뜨게 된다.
대흥동 주교좌 성당이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이 철거된 작품에 대한 관심을 일깨운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은혜 체험이요 대단한 역사라 볼 수 있다.
벽화인 이 작품 위에 덪칠을 해서 지웠기에 이 덪칠을 벚겨내고 복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이 작품의 가치를 알고 복원을 원하는 혜안있는 사목자와 뜻있는 교우들의 정성을 가상히 여긴 하느님의 도움으로 작가가 있던 프랑스 수도원에 보관된 원작의 스케치를 발견해서 새로 복원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 있었던 이 작품의 가치성을 인정하고 알고 있던 인사들의 협조는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부통 신부님이 말년에 머물던 수도원을 찾아가 거기서 그분이 남긴 작품집을 발견하고 또 이 도면을 바탕삼아 신부님의 뜻에 맞게 작품을 복원한 복원사를 신앙 체험의 감동을 주는 것들이었다.
중세기 화가로서 너무도 경건한 삶을 살았기에 성인으로 불리는 프라 안젤리코는 성화를 그리기 전에 먼저 경건한 기도를 바친 후 그림을 그렸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는 기도의 냄새가 뭍어 있듯이 복원을 맡은 작가 역시 그동안 자기 인생에서 겪어야 했던 모든 체험을 바탕삼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마음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 했기에 모방 차원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작가의 뜻을 재현하고 자기의 신앙까지 담은 더 깊고 뜨거운 영적인 단계에 올릴 수 있었다.
부똥 신부님이 제작한 벽화의 재료는 당시의 열악한 처지에서 고급 안료를 구할 수 없으니 수성 페인트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색깔의 퇴색과 함께 벽면 자체가 마모되면 벽화가 감당하기 어려운 손상이 될 처지였다. 그러나 작품을 복원하면서 퇘색을 막고 작품을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도록 고급 캠퍼스에 유화로 제작해서 벽에 부착했기에 반영구적인 작품으로 변신할 수 있어, 작품이 제거되는 안타까움이 영구 보존되는 계기가 되었기에 큰 기쁨으로 변모되었다.
부활찬송에 나오는 “복된 탓 Felix culpa”라는 말이 복원 작업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신앙으로 더 승화시킨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체가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할 수 있는 10개의 장면으로 되어있으며 , 첫째가 바로 소개하는 이 작품이다.
보통 묵주의 신비에도 나타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일생을 잉태, 성탄, 동방박사 방문 등 같은 연대기적인 순서로 전개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작품은 십자가의 길에 나타나고 있는 신앙의 핵심을 전달하는 모습으로 전개한 것이 또한 특징이다.
작품 자체의 성 미술성과 함께 영적 삶의 성장에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며 성 베드로와 바울로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 것은 참으로 특별한 발상이면서 이 성화를 통해 우리를 높고 순수한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에 접근하게 만드는 획기적이면서도 창의적 신앙 여정으로 인도하는 좋은 시도로 볼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이미 이 성당에 제작되어 있던 가톨릭 신자인 이남규(루카) 화백이 제작한 십자가의 길과 연결해서 제작하면서 마치 이 작품이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는 묵상 자료처럼 준비함으로서 작품 자체의 내용 못지 않게 기도하는 사람의 신앙이 바로 현실 삶의 결단과 이어질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의 작품을 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길 “제 1처 예수께서 죽을 죄인으로 심판 받으심” 위에 이것의 묵상을 돕기 위한 목표로 제작된 것이다. 작가는 이 앞에 서는 신자에게 성 베드로와 바울로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크리스챤 삶에서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박은 것은 사악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죄이며 이것은 교회의 큰 기둥이었던 성 베드로와 바울로의 삶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의 이 시도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성 베드로와 바울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 마저 십자가에 바친 예수님의 수제자이기에 그분들의 결점을 제시한다는 것은 당치 않는 것처럼 보이나 작가는 모든 크리스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설득력과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즉 두 제자는 출생 신분, 사회적 여건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나 공통점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박해했던 죄인이라는 것이며 이 사실의 확인을 통해, 이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은 자기 죄에 대한 반성이 정화된 삶의 기본 임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는 두 사도가 죄인이라는 공통 분모로 주님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는 표시로 제자들의 아랫 부분에 닭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수난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베드로의 배반을 알리는 상징과 같다.
두 사도의 아랫 부분에 흰 닭이 있다. 그는 베드로의 십자가 쪽에 서서 베드로를 향해 큰 소리로 울고 있다. 성서는 이 참담한 슬픔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 시간 쯤 지났을 때에 또 다른 사람이 이이도 갈릴레아 사람이니까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게 틀림이 없소" 하고 주장하였다.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하고 말하였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루카 22: 59- 62)
닭은 우렁찬 소리로 울면서 베드로에게 자기 죄를 알고 뉘우치라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이 닭의 크기가 위에 있는 성령 보다 더 크게 그려진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성의 파괴에 우리가 짖는 죄가 얼마나 큰 장애인지를 표현한 것이다.
작가의 이 의도적인 시도는 크리스챤 신앙의 기본인 십자가 삶의 묵상에 있어 자기 죄를 뉘우치고 새로 태어나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기본임을 강조하고 있다. 죄라는 것은 벌이나 멸망으로 연결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은총의 자리임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우리의 일상 삶에서 크리스찬으로서 신앙의 증거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앙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살면서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면서 실재 삶으로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현대 크리스챤들이 쉽게 빠지고 있는 삶의 자세로 지적하고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교회의 기둥이었던 베드로와 바오로의 어두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각자도 바로 자신의 죄 특히 윤리적 차원의 죄만이 아니라 실재 삶에 있어서 크리스챤임을 부인하는 근본적인 죄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교회를 다스릴 의뜸임을 상징하는 천국 열쇠를 쥐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선교하다가 바티칸 언덕에서 순교했는데 그가 십자가 형을 선고 받자 그는 주님과 같은 죽음을 맞게 된 것을 감사히 받아 들이면서도 자신은 주님을 배반한 후회스런 경력이 있기에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를 맞이할 수 없고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기로 원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십자가이다.
사도 바울로는 베드로와 달리 십자가 형을 당하지 않고 참수형을 당했다. 당시 로마 법에는 십자가 형은 너무도 처참하기에 백성들에게 경고를 줄 수 있는 흉악법이나 정치범에게만 십자가 형을 부여했다. 로마 시민권자는 십자가 형을 부여하지 않고 참수형으로 집행했기에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로는 참수형을 당했다는 표시로 칼을 들고 있다.
또 이 칼은 바울로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교회를 박해하던 처지에서 주님을 만나고 복음전파의 일꾼으로 변신한 바울로의 진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제자들 위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하늘을 오르고 있는데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선고된 예수님이 고통의 여정을 겪으신 후 오르실 하느님 아버지 곁임을 암시하고 있다.
형식적이며 습관적으로 바치기 쉬운 십자가의 길 기도의 시작을 성 베드로와 바울로의 삶을 조명시켜 우리의 신앙이 승화된 차원에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작품성 이전 성숙한 신앙의 표현으로도 대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세기 성화는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신자들에게 확실한 시청각 교재의 역할도 한 것처럼 작가의 작품 역시 크리스챤 삶의 십자가는 단순한 신앙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임을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작가가 제작한 이 작품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제작한 많은 작품들이 이 성당에서 처럼 지워지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이것은 성미술에 대한 무지만이 아니라 한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너무 일천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근래 우리 교회에 새로운 작품의 성미술이 등장하면서 이것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조각이라면 옮기거나 벽화라면 지워버리는 예가 종종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은 교회안의 반달리즘(Vandalism) 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성서적 이해에 대한 대단한 신념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해 제작한 자신의 작품이 어이없이 지워지는 것을 보면서 무척 마음 아파 하셨으며 이 작품이 지워졌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눈물을 흘리셨다는 일화도 있다.
고의나 악의는 아니드라도 반성하고 고쳐야 할 중대한 실수이며 성미술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통과의례의 하나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대흥동 대성당이 이 작품을 여러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복원했다는 것은 대성당이 지녀야 할 품위를 회복했다는 면에서 참으로 100년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예언적인 시도라 볼 수 있다. 이 복원 작업을 통해 우리들의 성미술에 대한 이해가 더 정확하고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은 큰 이익으로 볼 수 있다.
사회 여러 부분이 그렇듯 시작은 항상 예언적인 성격이 강하기에 기존 사고방식에 젖은 사람들에게 생경스러움으로 닥아올 수 있고 이것은 박해가 아니면 외면으로 다가오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 작품의 진가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면서 정착된다.
이 작품이 복원된 것은 이런 관점에서 성미술에 대한 이해가 그리 성숙하지 못한 우리의 처지에서 성미술에 대한 폭과 깊이를 성장시키는 견인차의 역할을 했다는 면에서 더 의미있는 사건이다.
다음 성서 말씀이 생각난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요한 1: 9- 10)
그동안 부똥 신부의 작품성을 이해하던 사람들이 작품이 지워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하던 처지에 대흥동 대성당에 이 작품이 복원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작가의 작품성에 대한 복권의 몸짓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찬사일까?
여러 관련자들의 선의를 모아 이 작품을 복원한 본당 사목자와 여기에 동참한 여러 교우들의 예언자적인 박진성이 이땅의 성미술의 수준을 격상시켰다는 것과 성미술을 차원높이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 것 같아 여간 반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