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거룩한 밤 (Helige Nacht,1912)
작 가 : 에밀 놀데 (Emil Nolde: 1867-1959)
크 기 : 캠퍼스 유채 (100 X 86 m)
소재지 : 에밀 놀데 재단
크리스챤으로서 성탄을 지나치게 확대 과장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성탄은 이제 어떤 의미로든지 인류의 축제가 되었다. 이 축제라는 개념이 크리스마스(Christmas)라는 말과 연관되는 신앙의 축제는 아니더라도 인류 전체의 축제로 확산되고 있다. 현대에서 어떤 이들은 너무도 상업성에 의지하기에 성탄 자체가 크리스챤으로서 의미를 퇴색시킨다고 부정적인 의견을 내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의 미사로서의 축제, 교회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축제는 아니더라도 축제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성탄을 지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탄 미사나 예배에 참석했느냐와 다르게 성탄을 기억하며 경축한다는 사실만으로 현대에 있어 성탄의 의미성은 전통성과 다르게 새롭게 재현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관점은 새로운 성탄의 의미성을 찾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개신교 신자로서 표현주의 기법에 심취한 작가는 현대 작가로서는 드물게 자기의 작품 안에 종교적인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작품을 제작해서 현대에 있어 가톨릭에서 조르쥬 루오(Georges Rauault : 1871-1958)나 유대교에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 1887-1985)이 작품을 통해 자기의 신앙을 표현한 것처럼 개신교에선 작가가 종교화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생애 ”라는 9폭의 작품 중 첫 번째인 성탄에 관한 것이다.
구성은 좌판 좌단 위아래로 ‘(1)거룩한 밤(탄생)’ ‘(2)동방 박사, 세 사람 좌판 우단 위아래로 ‘(3) 성전에서 박사들과 토론하시는 소년 예수’ ‘(4) 그리스도와 유다’, 중판에 ‘(5)십자가에 달리심’,우판 좌단 위 아래로 ‘(6) 무덤 주위의 세 여인’ ‘(7) 부활’, 그리고 우판 우단은 아래에서 위로 ‘(8) 사도 도마의 불신’과 ‘(9) 예수 승천’이다.
전통적인 성화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성탄 사화를 짜임새 있게 배치하여 관람객에게 예수 성탄을 시각적으로 관찰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또한 그 시대에 어울리는 복장이나 장식을 통해 현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작품이 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관람자들을 인도하고 있다.
작가는 20세기 표현주의 작풍을 이용하여 20세기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감성적인 표현을 집중적으로 사용했다.
표현 주의자들은 감정과 감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중심으로 두었으며 이들에게 선, 형태, 색채 등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 여기고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과거의 전통은 무시되었다.
그러기에 작가는 전통적인 성화의 주제였던 성서의 내용으로부터 시작하는게 아니라 이미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성탄의 현실을 통해 작가 나름의 성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성가족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는 전통적인 경건한 인상과는 거리가 먼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모습들이다.
이 젊은 부부의 모습은 성탄 말구유에서 만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지하철이나 시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러기에 전통적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이어지는 성탄 송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명의 활력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요셉과 마리아는 그동안 교회가 많이 강조해온 수도자나 성인과 같은 모습의 부부가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런 부부의 모습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식 하나는 반듯이 키우겠단 그런 열망이 충만한 부부의 모습이다.
여관을 얻지 못한 마리아와 요셉이 마굿간에서 산고를 치른 후 아들을 순산했다.
아직 첫 경배자들인 목동들도 도착하지 않았고 아들을 출산한 자리인 말구유에선 말들이 물을 먹고 있다. 한마디로 예수 아기는 방금 출산한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안고 싶은 부모의 손에 옮겨진 상태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부부는 자기 사랑의 분신과 같은 아들을 보면서 부부 존재의 의미성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있다. 부부는 산고도 잊은 듯 아기를 안고 기뻐하고 있다.
목동들도 도착하지 않는 시간이라 아기와 부부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예수 아기를 낳은 성모님은 너무도 기쁨에 겨워 아들을 훌쩍 들어 올리고 있다.
부부가 기쁨에 겨워 아들을 들려 올린 뒷면에 대단한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듯 짙은 청색의 하늘엔 총총한 별들이 있고 구세주를 기다리는 중생들을 인도할 샛별이 선명히 탄생한 아들을 비추고 있다.
전통적인 개념의 성화라고 보기에는 너무 현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리아의 얼굴은 구세주의 어머니이기 이전 첫아들을 낳은 어머니로서의 기쁨이 충만하다. 전통적인 성화는 너무 숭엄해서 절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자연스러운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어머니 마리아가 들어 올린 아들 예수는 아직 세상을 바라보고 어머니를 확인할 수 있는 눈도 뜨이지 않는 핏덩어리의 모습이다. 분명히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태어난 아이지만 아직 인간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형성되지 않는 핏덩이의 모습이다.
전통적 성화는 전혀 다르다. 아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후광이나 빛으로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세상과 다른 초월적인 존재임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것은 전례적으로 꾸리는 말구유에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오신 점을 강조함으로서 우리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발견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요셉과 마리아를 바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면을 강조하고 있다.
아기 예수는 이 부부들의 도움과 양육이 필요한 존재로 드러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사랑어린 배려에 힘입어 미완성에서 완성의 향해 나아가는 구세주로서 하느님 아들로서 성숙하는 아기 예수를 그렸다. 예수님이 우리와 꼭 같은 약점과 한계를 지닌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직 형상이 뚜렷이 드러나지도 않는 미숙한 모습의 아기 예수이지만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혼신을 다한 협력으로 튼실한 아기로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이 요셉과 마리아의 표정 속에서 믿음직하게 드러나고 있다.
요셉은 아내 마리아가 기쁨에 넘쳐 들어올린 아들 예수를 마리아와 같은 격정이 아닌 듬직한 남자다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너무도 평범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구세주를 영접하기 위해 마굿간의 나귀와 멀리서나마 분주하게 달려오는 목동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목동들이 도착해서 아기 앞에 경배하는 순간 세상에는 구세주의 탄생이 알려질 것이고 요셉과 마리아의 기쁨은 더 없이 커질 것이다.
작가는 부부들의 사랑에 의해 태어나는 모든 어린이들의 모습 안에 하느님의 아들을 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기에 작가는 예수의 성탄은 이천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사랑하는 부부들을 통해 쉼 없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적 사건임을 알리고 있다.
전통적인 성화처럼 예수 성탄을 너무 신화화하거나 회화 화하기보다 오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중생들을 통해 구세주가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종교의 신비화는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만드는 반면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성탄의 관계는 세상에서 평범한 삶의 정황에서 이루어지는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전통적인 성화는 탄생하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는 차원이었으나 작가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관점을 강조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성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언급 할 때 국한해서 사용하신 용어인데, 예수님이 이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그분의 사명과 직결된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진정한 인간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사람의 아들에 대한 언급은 에스겔서와 다니엘서에 나타나고 있는데, 에스겔서에선 하느님이 강생을 통해 인간에게 더 가깝게 되신 모습으로 나타낸 반면, 다니엘서는 인류가 변혁을 찾으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표현으로 등장하는데, 전통적인 성화는 다니엘서의 표현을 사용한 반면 작가는 에스겔의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예수님의 인간성에 대한 강조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전통적인 교회 신학 역시 예수님의 신성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분의 인간다움(Humannes)을 억제했기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정확한 이해가 왜곡되거나 미숙하게 표현된 것은 오늘 그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는 신학적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요, 참 인간이란 신성과 인성의 균형을 지닌 존재로 정의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더 비중을 둠으로서 그분의 인성은 위축된 표현으로 드러나는 현실에서 참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표현에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성탄으로 오신 예수는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라는 면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어설픈 인간의 옷을 입은 친근감을 느끼기 어려운 신으로 부각되는 것은 안타까운 면이 되고 있는데, 작가는 이런 안타까움의 물고를 시원히 틔워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의 예수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인도의 시인 타골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세상에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볼 때 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 대해 실망하지않으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성탄은 이천년 전에 있었던 역사의 회상이기 이전 오늘 우리 삶의 현실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심을 표현하는 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진정한 성탄의 바른 의미로 보고 이것이야 말로 현대인들에게 예수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 현대적 신앙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르네상스 작가들이 표현했던 어릴 때부터 신성을 강하게 표현하는 예수 아기와 전혀 다른 오늘 우리 사회에서 흔히 태어나고 있는 인간의 출생을 통해 드러나는 성탄 신앙이야 말로 구김살 없고 자연스러운 신앙임을 알리며 이런 현대적인 감성 표현을 통해서만 현대인들은 하느님을 생기 있는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종교가 현대인들에게 생기 있는 모습으로 부각하기 위해선 그동안 시대의 특수한 모습을 통해 의미가 있었던 것에서 벗어나 현대인들의 심성에 걸 맞는 표현을 강조해야 함을 알리고 있다.
전통적인 신앙 표현에 익숙한 유럽의 신자들처럼 성탄이나 부활절에 와서 과거의 기억을 일깨우는 낭만 수준의 행사가 아니라 이 작품은 현실의 삶을 꾸리는 데 필요한 힘을 예수의 성탄으로 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의 내용을 동일하지만 표현은 다양하게 그 시대에 맞게 표현하고 설명하는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개신교 신자이면서 현대적인 감성의 표현에 심취한 작가의 작품은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현대인들에게 전달하면서 신앙이 어떤 낭만이나 기억이 아니라 어렵고 각박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순수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부부를 통해서 오늘도 재현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