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를 빌며...
이 아침, 얼핏 '방하착(放下着)'이란 용어가 떠오른다.
이 말은 "공허한 아상(我相), 즉 나의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로, 흔히 불가의 스님들이 잘 사용하고 어떤 화두가 잘 풀리지 않을 때 곧잘 떠올리는 말로 알고있다.
2월 말쯤이면 이곳 정동 수도원에 대공사가 있을 예정이어서, 콧구멍만한 방에나마 이것저것 자질구레 쌓여있는 짐들을 정리하여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 6개월여 임시로 거처할 평창동 수도원으로 옮겨야 한다. 짐이래야 거의 책들이고 적은 소지품들이지만, 그래도 정리해야 한다는 작은 강박감이라 해야 할지 좀 심란해지는 거다.
우선 어제 눈에 띄는대로 그동안 취미로 찍었왔던 세월의 묻은 흔적들이 쌓여진 사진들을 정리하고 보니 절반 정도는 버려야 할 것들을 추려내면서, 어릴 적에 두어번 이사를 하면서 오랜 세월 세간들과 뒤섞여서 구접스레하셨던 어른들의 모습이 아스라이...그런 것들중 할머니가 늘 사용하셨던 얼레빗하며 엄마의 동동구리무 곽...같은 것들이며 작고 큰 살림살이들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들이 떠오르는 건 웬일일까. 어쩌면 오랜 세월 우리 인생과 함께했던 소도구들을 쉽게 버리지 못한 예전의 어른들과 무어든 쓸만한 물건들임에도 쉽게 내다 버리는 요즘의 세대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내 경우엔 전자에 속하지 않을까 하며 씨익 웃음이 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수도생활을 해 온 나로서는 세간살이에 대한 옛 어른들과는 달리 집착에서 쉽게 벗어나야 한다는 생활 습관과 영성에 배어서인지, 매사에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쉽게 타인에게 주어버리거나 애착에서 금방 벗어나는 '방하착'의 실천을 잘 해온 편이란 생각이 들지만, 자주 미진한 찌꺼기들이 남아있는 것같은 찜찜함에 그럴 때마다 새로운 도전의식을 지니게 된다.
빛바랜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메모랜덤에 깨알같이 오랜 세월 적혀 온 한 귀절이 눈에 띄어 여기에 적어본다:
"과거의 좋은 것들을 추억하기
현재를 잘(충실히) 살아가기
미래가 잘 되리란 굳은 신뢰와 희망을 지니기"
사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필요한 것들이 많겠지만, 실상 하느님 품으로 돌아갈 때면 아무것도 지니고 갈 것이 없다. 그래서 평소의 삶에 '방하착'이란 예행 연습이 꼭 필요한 것이리라. 특히 쌓여지기 쉬운 찌꺼기들이나 마음의 구설수같은 것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