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오늘 말씀들은 아주 희망적입니다.
그러나 처한 상황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은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지금 죽어가고 있지만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말씀은 희망적이지만 상황은 절망적이라는 얘깁니다.
저는 포기를 잘합니다.
거절을 당할 경우 굳이 설득을 하려고 하지 않고
오해를 받으면 이해를 시키려고 애쓰지 않는 편입니다.
설득이나 이해를 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구질구질하다 생각되는 겁니다.
청탁도 잘 안 하는 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그래도 조금 그러나 억지로 청탁을 하기도 하지만
저 자신을 위해서는 청탁을 안 합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살며,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살지 아쉬운 소리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핑계를 대거나 다른 사람 탓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닙니다.
핑계를 대거나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는 것이
나의 자존심이랄까 주도권을 값싸게 팔아버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눈치가 빠른 분은 이것이 바로 교만임을 아실 겁니다.
좋은 뜻에서 포기를 잘하고, 핑계를 대지 않거나 탓을 돌리지 않거나
좋은 뜻에서 청탁을 잘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랑이 없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밖에서 사는 보통 남자들을 보며 저를 뉘우칩니다.
그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굽실거려야 하고,
자존심 상하지만 청탁이나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저도 아무런 치료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되거나
제게 아들이 있는데 절망적인 상태에 있어도
요즘말로 쿨 하게 사는 걸 포기하고 아무런 노력도 청탁도 아니 할까요?
정말로 제가 높은 가난의 상태에 계속 있을 수 있을까요?
저도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 된다면
그리고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 절망적인 사랑이 하느님께 온전한 희망을 두게 할 것이고,
하느님께 대한 이 희망이 하느님을 온전히 믿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왕실 관리도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남의 청탁은 받아도 남에게 청탁은 거의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아들이 죽게 되자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께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왕실관리의 믿음은 애초에는 그리 큰 믿음이 아니었고,
믿은 것도 주님을 믿었다기보다는
죽게 되었을 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믿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애타게 청을 하고,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신앙이 자라나 애초 의사를 데려 가듯
주님을 모셔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아들이 살아날 거라는
희망의 말씀만 믿고 떠나가고 기적을 확인케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과정의 신앙>입니다.
애초부터 대단한 신앙인들이 아니고 지금의 믿음 작습니다.
그러기에 나의 믿음이 참으로 작음을 겸손히 인정하면서도
지금은 비록 작은 우리 신앙이지만 키워가도록 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