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불행하여라,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복음마다 특징이 있듯이 루카복음도 특징이 있습니다.
행복선언에 있어서도 루카복음은 다른 색깔을 갖고 있지요.
곧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을 통해서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축복도 하시지만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경고도 주님께서 하시는 건데
이 경고가 마치 저주처럼 들릴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강하게 불행을 경고하실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우리의 불행 불감증 때문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아니 대부분이 그러려니 하며 삽니다.
자기의 불행을 직시하거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다 그런 것이고,
이런 것을 다 불행이라고 생각할 것이 뭣이냐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묘한 자기 속임입니다.
불행을 인정하면 더 불행해지기 때문에
불행을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처럼 함으로써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어도
불행은 당연하고 피할 수 없는 거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고통을 불행과 등식화하면서
불행도 당연하고 피할 수 없는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그렇고 모든 깨달은 사람은 말합니다.
고통이 곧 불행이 아니라고.
고통이 곧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불행한 거라고.
오늘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해도, 굶주려도, 울어도, 중상과 모욕을 당해도 행복하다고.
반대로 부유해도, 배불러도, 웃어도, 사람들이 칭찬해도 불행하다고.
그런데 부처님과 예수님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행복한 이유가 하느님 나라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불행한 이유도 하느님 나라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현세와 내세의 행불행을 모두 말씀하신다는 점도 다른 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 말씀의 시제를 보면 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한데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현재형의 행복을 말씀하시고,
부유한 사람은 불행한데 이 세상에서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현재형의 불행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지금 굶주리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배부르게 될 것이고,
지금 우는 사람이 웃게 될 것이라고 미래형의 행복도 말씀하시고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서는 배부르고 웃지만
하늘나라에서 굶주리고 울 거라고 미래형의 불행도 말씀하십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이미 가까이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면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고 미래에까지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행복한 것이 아니며 영원히 불행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루카복음은 우리의 불행을 직시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지 않으면 불행이라고 말하고,
하느님 나라 대신 이 세상을 선택함으로써 행복하려고 하지 말라고도 하고,
이 세상 행복이 불가능할 때 다 그런 거라고 자신을 속이지도 말라 합니다.
우리는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행복하려고 들지 말 것이며
적극적으로 불행을 피하고 적극적으로 행복을 선택하라고
오늘 루카복음의 주님은 우리에게 강력히 촉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