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26-38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고유 복음)
‘모후’를 기리는 오늘,
교회가 펼쳐 주는 복음은 뜻밖에도
‘왕관을 쓰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 탄생을 예고받는 장면’입니다.
바로 여기에 마리아 모후 되심의 ‘뿌리’가 있습니다.
천사는 이렇게 전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께 다윗의 왕좌를 주시어,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곧 마리아께서 잉태하실 그 아드님이
‘영원한 임금’이시라는 것입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일깨우듯,
마리아께서 ‘모후’이신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임금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이 왕이시기에, 그 어머니가 모후이십니다.
그런데 이 ‘여왕’은 어떻게 그 자리에 이르렀습니까?
왕관을 향해 손을 뻗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가장 낮은 한마디로 이르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왕’의 자리가 ‘여종’의 응답에서 솟아난 것입니다.
마리아의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고,
그분의 왕관은 ‘낮춤의 열매’입니다.
마니피캇이 노래한 그대로,
‘비천한 이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모후 되심은
우리에게서 멀어지심이 아닙니다.
다윗 왕조에서 임금의 어머니가
백성을 위해 임금께 청을 올렸듯이,
마리아께서는 임금이신 아드님 곁에서
우리를 위해 ‘어머니로서 비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실수록,
그분은 우리를 위해 더 가까이 비십니다.
평화·인내의 관점에서 보면
마리아의 ‘예’는 한순간의 감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칼이 마음을 꿰뚫는 십자가 아래까지
이어진 ‘인내의 예’였습니다.
끝까지 견딘 그 섬김의 ‘예’가
마침내 ‘평화의 모후’의 관으로 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높아지려’ 손을 뻗는가, ‘낮추어’ 섬기는가?
나의 ‘예’는 한순간인가, 끝까지 이어지는 인내인가?
나는 다스림을 ‘군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여기는가?
나는 모후이신 어머니께 나를(그리고 모든 생명을) 의탁하는가?
주님,
마리아처럼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고 낮추게 하소서.
그 ‘예’를 끝까지 이어 가는 인내를 주시고,
평화의 모후이신 어머니의 전구로 저희를 지켜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