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3월 27일 수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 26,15-16)
은돈 서른 닢
유다가 유대인 사제들에게 한 말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주는 대가로 기꺼이 돈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요 진리의 말씀을 넘겨주고 자기 영혼에서 그분을 물리치는 대가로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받는 이들과 똑같은 일을 합니다. 실로, 돈이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죄를 저지름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배반하는 자는 누구나 유다의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배반하는 죄의 대가로 이 세상의 이득을 주는 원수에게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며, 드러내 놓고 원수의 권능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유다에게 준 동전의 개수는 구원자께서 이 세상에 머무신 햇수와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에 세례를 받으시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곡식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서른 살 때였습니다(창세 41,46 참조). 그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서만 곡식을 준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집트인들에게도 주셨듯이, 복음도 성도들을 위해 준비되었지만 불충하고 사악한 자들에게도 선포되었습니다.
-오리게네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두 번째 사랑은 은혜로운 사랑 내지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이 사랑을 통해 사람의 영혼이나 천사의 영혼 안으로 흘러 들어가십니다. 그러면 지성을 부여받은 영혼은 창조계의 모든 빛보다 더 밝은 빛을 받아서, 자기를 중심으로 삼던 태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컨대, 나의 눈이 강한 빛이어서 자신의 충만한 힘으로 햇빛을 받아들이고, 햇빛과 하나가 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나의 눈은 자신의 충만한 힘과 햇빛과 해에 들어 있는 힘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지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모든 피조물에 맞추어졌던 나의 지성을 거두어 하느님께 맞춘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은혜를 나의 지성 속으로 끊임없이 부어 넣으실 것이고, 나의 지성은 밝아져서, 성스럽게 주어진 이 사랑과 하나가 될 것이고,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알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지성을 부여받은 피조물 속에 자신을 부어넣으시고, 우리의 지성은 하느님의 은혜로운 빛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마침내 그 빛, 곧 하느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습니다.(143)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3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27-28장 / 사도 1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4절: 서구의 새 정신
클뤼니에서 그리고 수도생활에서 시작되어 현저하게 증대되어 온 종교운동은, 곧 서구 그리스도교의 생활 전체를 장악하였다. 한 시대의 그리스도교적인 성격을 올바로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신심과 이웃 사랑의 여러 가지 형식에서, 교회적이고 자선적인 목적을 위한 신자들의 헌신적인 정신에서, 예술 창작과 문학에서, 큰 공동체적 임무에의 참여 등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한 시기의 가시적인 업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생활화되고 복음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지는 내면성과 깊이의 정도 여하에 따라 측정된다.
수도생활의 새 양식:
수도생활과 완덕 추구의 노력 정도는 언제나 한 시기의 종교적 • 교회적 생활의 강도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척도이다. 만약 중세 전성기가 수도생활과 성직자와 평신도의 수덕생활을 위한 새로운 형식을 많이 만들어 냈다면, 그것에서 종교적인 특정만이 아니라 영적 생활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형성에 대한 갈망도 인식될 수 있다. 종교적으로 감동을 받은 모든 신분의 남녀들이 많이 수도생활로 향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중세 초기의 수도회 생활인 베네딕토회의 단일한 형식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개별적이건 집단적이건 광야에서 은수사로서 생활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속죄하고 설교하며 유랑생활을 하였다. 청빈과 자발적인 금욕과 더불어 사도적 생활은 그들의 생활 이념이었다.(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