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2월 25일 사순 제2주일
고 도미니코 ofm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변모하시는 결정적인 사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또한 변모 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변모해야 할 것들이 무엇이고 변모를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감정과 덕행의 변화와 변모하게 하는 기도와 영적독서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감정의 변화에 대해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 내지 느낌은 육체와 정신의 중간 통로로 볼 수 있습니다. 감정을 낳는 것은 정신이나 영혼이지만 화가 나 있거나 열중해 있거나 풀이 죽어 있는 사람을 볼 때 쉽게 알아볼 수 있듯이 그것은 육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감정은 인격의 장식물일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 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한번의 눈길, 한번의 손길이 많은 얘기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때도 있습니다. 느낌들은 깊이 있게 말할 수 있으며 우리 마음속에 덕이 존재하는 한 깊은 느낌들은 내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감정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 정신의 통제를 받고 더 긍정적이고 성숙되게 변화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부정적 감정이 억압받을 경우 그것이 내적으로 전개되어 신경장해나 나아가 육체적인 질병을 야기시킵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해소시키는 데 참으로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들을 발생시키는 근본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감정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덕행의 결핍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이런 감정들을 치유하는 길은 덕행스런 태도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적절한 근본덕행을 발전시키면 부정적인 감정들이 긍정적 감정으로 바뀝니다. 적절한 덕행을 닦는 것은 부정적 감정을 항구히 해소시키는 방법입니다.
무질서한 감정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필요한 덕을 점진적으로 닦아나가며 무질서한 감정 때문에 고민하지 않은 지점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덕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감정들은 조화롭고 긍정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덕행과 기도의 삶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덕행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주어진 상황에 맞게 반응하도록 하는 마음 깊이 뿌리내려 몸에 베인 좋은 습관으로 정의 내릴수 있습니다. 덕행은 온갖 은혜의 원천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 1독서에서 들은 덕행의 모범인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덕행은 내적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초조감과 시기, 분노를 비롯한 그밖의 여러가지 무질서한 반응들은 우리의 삶에 많은 불행을 가져옵니다. 이런 것들이 아브라함 처럼 믿음과 순종의 덕스러운 반응으로 변화된다면 큰 내적 평화가 옵니다.
기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덕행을 개발하도록 하며, 덕행은 보다 깊은 기도의 길로 인도합니다. 기도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덕행을 지닐 수 없으며 덕행에 관한 지적 지식은 영적독서를 통해 얻어집니다. 덕행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은 인간에게 큰 해독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 들어오도록 영혼을 열어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못들어오시게 하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고 맙니다.
감정과 덕행의 변화 그리고 기도와 영적독서의 통합적이고 조화로운 삶을 통하여 먼저 자신이 변모되어 다른 이를 감화시키는 가운데 충만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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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2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마태 9-12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체성사를 위해 죽은 개종한 프로테스탄트
이탈리아-19세기
도둑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그는 어두운 성당 안에서 제단으로 가까이갔다. 그가 훔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둑들 뒤로 가서,재빨리 부서진 감실에서 성체가 보관되어 있는 성합을 든 손에 대해 깜짝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신부가 아무런 방어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신부에게 다가섰다. 그들은 그 성합을 다시 빼앗기 위해 위협적으로 신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사정없이 신부를 내리쳤다. 그리하여 신부는 성체를 이 사악한 자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가슴에 꼭 붙들고 있었다. 도둑 중의 한 명이 권총을 꺼내서 피를 흘리고 있는 신부에게 겨냥했다.
신부는 치명적으로 머리에 총을 맞고,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 하고 외치면서 제단의 계단으로 쓰러졌다.
바로 그 때 주임신부가 성물 관리인 두 명과 함께 성당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재빨리 도둑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제단으로 서둘러 왔을 때 몇 시간 전만해도 건강했던 아르투르 신부가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창백한 손으로 손상되지 않은 성체가 모셔진 성합을 심장이 멎어가는 가슴에다 꼭 안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주임신부에게 성체를 넘겨 주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행복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의사를 부르려고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언젠가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성체의 형체 안에서 이 남작 신부를 사랑스럽게 재촉하시듯 쳐다보셨고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시키시고 숭고한 사제직으로 부르셨었는데 예전에 개신교 신자였던 아르투르 남작은 이제 제대 앞에서 피를 흘리는 속죄양처럼 누운 채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하였다.(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