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 말씀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를 무척 씁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려고 도무지 애쓰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과 아닌 사람을 가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저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써야 할까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에 반기를 들 듯이.
무슨 얘기냐 하면 원수를 만들어 놓고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고
원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원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아예 아무 관계를 맺지도,
누구와도 엮이지 말자는 뜻은 물론 아니고
누가 원수의 짓을 해와도 원수를 만들지 않겠다는 그런 뜻에서 말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원수 짓을 해와도 원수로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게 원수가 악한 짓을 해도,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그것이 악한 짓이어도
내게는 그것이 악이 아닌 그런 경지에 이르면 애초에 아무 원수가 없고,
전에 원수였어도 이제는 원수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지가 오늘 하느님 사랑의 경지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경지 말입니다.
이는 마치 연기에 그을려도 그을음을 전혀 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어떤 악을 저질러도 그것이 그에게는 전혀 악이 되지 않는 경지입니다.
어렸을 때 수인선 협궤 기차를 타고 인천을 갔다 오다 보면
굴을 몇 개 통과하게 되어 있는데 굴을 지나고 나면 석탄 연기에
얼굴이 모두 검둥이처럼 되어 서로 킥킥대며 웃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머리를 좀 쓰는 친구들은 얼굴을 보자기로 감쌉니다.
그것처럼 누가 아무리 악의 비를 퍼부어도
우산을 큼지막하게 쓰면 그 비에 젖지 않겠지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를 보면
얼굴빛 차돌처럼 만든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런데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건 얼굴에 보자기를 써 그을음 타지 않는 것과 같고,
차돌처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합니다.
그러나 모욕과 수모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만 모욕이고 수모이고,
모욕과 수모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만 악이기에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악이 되지도 않고 얼굴빛 변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만 프란치스코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곧 자기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외에 자기가 원하는 것은 없는 경지입니다.
전에 원수였어도 이제는 원수가 아닌 그런 경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외에는 원하는 것도 없고 원치 않는 것도 없는
그런 경지를 당장 이룰 수는 없어도 감히 꿈꾸고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