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끄러운 제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부끄러운 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 의로움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불의를 자주 많이 보는데,
얼마 전엔 어느 나라 대통령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서 종교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요즘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 인간이 사라져야 종교 자유가 올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비단 한 번이 아닙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났을 때도.
그런데 오늘 에제키엘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저는 그들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주님은 그들의 죽음이 당신의 기쁨이겠냐고 저에게 물으십니다.
저의 의로움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을 단죄하는 의로움입니다.
저의 의로움에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로움이 의로움이기는 한 것입니까?
자기 불의를 보지 못하는 의로움을 어떻게 의로움이라고 하고,
사랑이 없는 의로움을 어떻게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가 악하면서 더 악한 사람을 단죄하려는 저의 의로움,
사랑이 없는 저의 의로움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이제 악인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의도도 고작 저와 인간의 죄와 악을 들추는 것이 아니고
악인도 살게 되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돋보이게 하고자 함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왜 압도적인 사랑이라고 합니까?
어떤 거대한 힘들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일 때 우리는 압도적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이란 어떤 거대한 악도 하느님의 사랑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해는 자주 능력의 하느님이 왜 극악한 사람을 내버려 두시는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사람까지 살려 두시는지 이해하기에 버겁습니다.
그 한 사람의 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데,
그러니 그 한 사람을 척살하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 않는데,
그러니 많은 이를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의일 텐데 왜 그러지 않으시는지.
그러나 어쨌거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의보다 사랑을 선택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당신 의로움 때문에 악한 인간을 죽이시면 살아남을 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내가 나보다 더 불의하다고 하여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하면
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아무리 악해도 그가 죽길 바라지 않고 살길 바라십니다.
아무튼 하느님 사랑은 한 사람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하느님도 의를 선택하여 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벌도 사랑입니다.
그 벌은 불의에서 의로 돌아서게 하는 사랑의 벌이고,
돌아설 기회마저 없애버리는 마지막 징벌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벌 때문에 의로 돌아서는 그런 미성숙한 자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악을 압도하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돌아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