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저는 옛날과 비교하면 그리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하지 않은 이유가 가난하게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프란치스칸이 되고 처음에는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무척
따라 살고 싶었고, 그래서 흉내를 많이 내곤 했지요.
그런데 제가 살았고, 지금도 사는 가난이 정말 즐겁고 기꺼운
가난이기보다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늘 군더더기처럼 있는,
그런 가난이어서 오늘 축일을 지내는 클라라 성녀가 무척 부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부러운 것이 꼭 클라라 성녀뿐이 아니고,
부끄럽게 하는 것도 클라라 성녀뿐이 아닙니다.
얼마 전 특별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을 봤는데
이름하여 Minimal Life를 사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 Minimal Life를 우리말로 바꾸자면 최소로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1)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는 것, 당연히 2) 과도한
소비를 줄이는 것, 그리하여 3) 시간과 공간을 단순화하고 낭비치 않는 것,
4)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 이로써 5) 환경을 보호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이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 등입니다.
이것을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가난한 삶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아무튼, 그들은 제가 서약으로 살고 의무로 살려는 것을 서약 없이도
자유롭게 그리고 기꺼이 살고 그런 사람들끼리 동호회 모임도 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처음 가르치셨고,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그렇게 열렬히 살고자 한
가난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여유롭게 하며,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합니다.
문제는 이 자유와 여유와 행복을 실제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느끼며 가난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아니, 저는 종종 그러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의 서약과 우리의 선택이 박물관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서약이 갱신되지 않고
우리의 선택이 매일 새롭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을 여전히 살면서도 서약과 선택은 박물관에 가 있기에
가난이 주는 자유와 여유와 행복도 갱신하지 못하는 것인데 저는
이것들을 박물관에 보내고는 제일 먼저 '나'를 다시 소유하였습니다.
사실 프란치스코나 클라라가 살았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야 할 가난은
물질이 없는 가난에 앞서 내가 없는 가난이고,
물질이 없는 가난에 앞서 욕심이 없는 가난이며,
욕심이 없는 가난에 앞서 사랑이 있는 가난입니다.
그런데 그 버린 나를 다시 주워 가짐으로써
물질에는 가난하면서도 사랑이 없고 그래서
당연한 결과로 가난의 자유와 가난의 여유와 가난의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클라라는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미약하지만
그 어떤 궁핍도, 가난도, 수고도, 시련이나 수치도, 세상의 멸시도
마다하지 않고, 우리가 이를 더없는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도 클라라처럼 프란치스코가 보고 크게 기뻐하는 삶,
가난과 고통과 멸시를 감수, 감당, 감내하는 삶을 살기로
오늘 다시 마음 먹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내 머무는 곳은 어디?)
http://www.ofmkorea.org/135212
17년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시선의 강탈, 관상의 상실)
http://www.ofmkorea.org/109458
16년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가난과 형제적 가난)
http://www.ofmkorea.org/92486
15년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시선 고정)
http://www.ofmkorea.org/81143
10년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가난과 사랑의 관상으로 빛나는 여인)
http://www.ofmkorea.org/4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