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시비 거는 바리사이들을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이 말씀이 얼핏 보면 사랑의 포기처럼 들리고,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조차 포기해버린 존재,
주님의 구원 대상에서 배제된 존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종종 포기해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지요.
그래서 이 말씀이 그 포기를 합리화할까봐 겁나는데
그런데 이 말씀이 정녕 그런 뜻인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물론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랑의 포기가 아니라 집착의 포기인 겁니다.
우리에게는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고집과 집착이 얼마간 있고,
그중에서도 내 힘으로 사람을 옳게 바꾸려고 하거나
심지어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려고도 합니다.
저만 봐도 이 나이 먹도록 집요하게
사람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 포르치운쿨라 행진 때 청원자들도 같이 걸었는데
청원장이 같이 걸었기에 제가 직접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도
자주 이 얘기 해주고 싶고 저 얘기 해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곤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남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지 말아야 함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포기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우리의 대부분의 의도와 시도에는 사랑과 욕심이 같이 있기에
포기하는 것이 사랑을 포기하는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바꾸라고 요구할라치면 내 안의 욕심 때문에 말을 못하겠고,
상관치 않으려고 할라치면 사랑을 포기하는 것 같아 망설여지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문제인 경우이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는 경우 그러니까
쇠귀에 경 읽기나 깨진 독에 물붓기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제는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마치고 같이 걸었던 친구와 서울로 올라오며
이 얘기 저 얘기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얘기 중에 성공하는 사람의
세 가지 공통점을 제 친구가 얘기하는 거였습니다.
공통점이란 첫째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는 것이고,
둘째는 남자답게 호탕하게 웃는 것이며,
셋째는 남의 얘기를 잘 경청하는 것이라고 하기에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제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제가 잘하는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경청도 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제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물론 경청을 잘하는 신부들도 있겠지만
거의가 그렇지 않고 저라고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불경청이라는 면에서 지금의 신부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저희나 그들은 왜 그럴까요?
왜 예수님조차 포기해버릴 정도로 경청을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노상 가르치려고만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는 가르치는 사람이지 듣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 한마디 해주면 그 말을 새겨듣지 않고 오히려
네 생각이 옳지 않으니 네 생각을 고치라고 가르칠 겁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 예수님도 정말 어쩔 수 없으신데
예수님마저 어쩔 수 없어 포기한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우리 인생의 풍랑도)
http://www.ofmkorea.org/132809
17년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가슴까지)
http://www.ofmkorea.org/109279
15년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두려울수록 하느님께)
http://www.ofmkorea.org/80918
12년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부재의 임재)
http://www.ofmkorea.org/33198
10년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인간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
http://www.ofmkorea.org/4268
09년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믿음, 그것은 구원 체험)
http://www.ofmkorea.org/2945
08년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칡에 등나무 되지 마라)
http://www.ofmkorea.org/1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