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례는 어제까지 다윗에 대한 사무엘기의 얘기를 다 들려준 뒤
오늘 집회서를 들려주는데 이것은 집회서를 통해
다윗의 삶을 종합적으로 들려주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복음은 헤도데에 대한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두 왕을 비교하게 되는데 공통점은
둘 다 왕이라는 것 말고도 둘 다 죄를 덮으려고 했던 점입니다.
다윗은 간음죄를 덮으려고 살인죄를 지었고,
헤로데는 잘못을 들춰내는 요한을 죽였지요.
사실 죄를 덮으려는 것은 이 둘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그러니까 저나 여러분 모두에게 공통적인 거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죄는 씻어버리거나 치워버려야지 덮어버려서는 안 되는 거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죄는 씻어서 버리든 치워서 버리든 버려야 하는 것인데
덮어버리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남는 거지요.
그래서 다윗과 헤로데는 덮으려고 했던 것까지는 같지만
다윗의 끝은 회개이고 헤로데의 끝은 여전히 죄인 것이 차이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작의 다른 결말>의 이유,
그러니까 시작은 같은데 이렇게 결말이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은 하느님 앞에 서 있고, 헤로데는 인간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나탄 예언자의 말을 듣고 하느님 앞의 자신을 봤지만
헤로데는 요한을 예언자라고 알고 있었음에도
그의 말을 듣고 하느님 앞에 서려고하기보다 사람들 앞에 있었습니다.
오늘 연회에 온 손님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려고 했던 헤로데였지요.
사람들 앞에서의 죄는 덮거나 숨기고 싶기 마련이고,
하느님 앞에서의 죄는 뉘우치고 씻어버리게 되지요.
겉뿐 아니라 오장육부까지 샅샅이 아시는 분에게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선 다윗은 죄를 뉘우치고 씻어주십사고
청원 기도를 할뿐 아니라 이제 씻어주신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그러니까 청원의 기도는 죄를 지었어도 가능하고,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도 가능합니다.
죄를 용서해달라고 자비를 청하고 근심 걱정에서
건져주십사고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러나 찬미의 기도는 죄와 근심 걱정이 있을 때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죄가 나를 짓누르고 근심 걱정이 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씻어버리고 근심 걱정을 치워버린 깨끗한 영혼의 입에서만
찬미의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재물이 없는 가난과 욕심이 없는 것도 가난이지만 실은
죄와 근심 걱정을 다 치워버리고 없는 것이 가난입니다.
순결과 가난은 이렇게 통하고 일치합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지가지의 죄를 짓고 덮으려던 다윗이,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섬으로써 그렇게 깨끗하고 가난하게 되고,
그래서 찬미의 시를 짓고 노래를 할 수 있었던 다윗이 부러운 오늘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사랑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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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시류에 흔들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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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생활기도와 성사적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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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르신 같은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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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작은 헤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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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가 헤로데와 헤로디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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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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