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적으로 보면 지난 사순 1주 주님께서는 광야에 계셨고,
거기서 주님께서는 시련과 유혹을 당하셨으며 악령과 마주하십니다.
사순 2 주일인 오늘 주님께서는 세 제자와 함께 산위에 오르십니다.
왜 산에 오르신 것이고, 왜 세 제자와 함께 오르신 건가요?
산위에 오르시어 기도하셨다고 하니 기도하러 오르신 건가요?
물론 기도하러 가신 건데 그렇다면 혼자 산에 오르지 않으시고
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으며,
제자들을 데리고 가는데 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 걸까요?
그러니까 오늘 질문은 주님께서 당신의 필요 때문에 산에 오르신 건지,
아니면 제자들에게 뭘 보여주기 위해 오르신 건지, 이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전례는 이런 뜻입니다.
창세기의 하느님과 복음의 주님은 아브람과 세 제자에게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시고 미래 얘기를 들려주신다는 얘깁니다.
창세기의 하느님이 아브람을 밖에 데리고 나가 하늘을 보게 하신 것처럼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세 제자만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게 하신 것이고
창세기에서 아브람에게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거라는 약속의 말씀을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것처럼 오늘 주님께서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들은 얘기는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얘기뿐이 아니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눈 얘기, 곧
예루살렘에 가시어 당하실 수난에 대한 얘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합을 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수난을 당하실 거라는 얘기를 들려주시며 동시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하늘의 소리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당신이 돌아가시고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우왕좌왕해도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음성을 보고 들은
너희 세 제자들만은 흔들리지 말고 중심을 잡아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환난을 당하더라도 하느님 체험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있고 또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어둠속에 있어도 빛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138편에는 “하느님 당신께는 어둠 그것마저 어둡지 않아 밤 또한 낮과
같이 환히 밝으며 캄캄함도 당신께는 빛과 같으오리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런 빛의 하느님과 우리가 있으면 어둠 가운데 있어도 어둡지 않게 되지요.
오늘 주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는데
주님과 함께 기도를 하는 우리도 이와 같이 관상기도를 해야 합니다.
지금 너무 곤궁하니 달라는 기도,
지금 어려움 중에 있으니 구해달라는 기도,
이런 애원의 기도도 우리가 해야겠지만 고통 속에서
고통만 보지 않고 하느님도 보는 관상의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훈련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라톤을 뛸 때 제가 체력훈련을 하는 측면도 있지만 정신훈련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뛰면 그때부터는 계속 고통만 있게 되는데
이제 5 km만 더 뛰면 고통도 끝나고 영광스런 완주의 기쁨이 있을 거라는
그런 희망보기 훈련도 하지만 고통 그 순간에도
고통만 보지 않고 하느님도 보려는 관상기도 훈련을 하는 겁니다.
제 인생 마라톤이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제가 70, 80을 넘어 여기저기
아픈 데뿐이고 점점 죽어갈 때 그 고통뿐인 순간에도 고통만 보지 않고
하느님을 보기 위해 우리도 오늘 제자들처럼 관상기도훈련을 해야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제 2독서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음은 바오로 사도가 잘 살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교만에서 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스스로 예수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려고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물론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겠지만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까...
바오로 사도를 성인으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언제부턴가
마음으로 깊이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제가 독서 대에서 바오로 서간을 봉독할 때는 저도 모르게
바오로 사도와 동일화 현상이 일어나는 느낌이 들어 봉독을 마치고 제단을
내려 올 때는 제 영혼이 빠져 나간 듯 휘청거림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야할 비장한 결심,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씀하시는 때에 제자들은 영문을 모르고 잠에 빠졌다
깨여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저에게 거울이 되어 줍니다.
제가 말하면서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십자가의 수난은 생각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만 생각하는 어두움의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언제나 예수님의 고뇌의 마음을 알아듣는 철든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훈련 없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없습니다. 김연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남모르는 훈련을 얼마나 했겠습니까...
이렇듯 영적인 것도 훈련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오늘도 강론 대에서 울러 퍼지는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