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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을 떠나보내는 아브라함(Abraham dismising Hagal) : 파브리시우스 바렌트(Fabritius Barent: 1624-1673)

by 이종한요한 posted Feb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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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갈을 떠나보내는 아브라함(Abraham dismising Hagal)
작가 : 파브리시우스 바렌트(Fabritius Barent: 1624-1673)
크기 : 목판 유채 (50 * 36 cm)
소재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시끄럽고 전쟁에 노출된 나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또 주변 아랍 국가들이다. 야훼 하느님을 믿는 유대교도인 이스라엘을 주변의 몇 억 아랍계 사람들이 둘러 쌓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유대인들은 본토인 이스라엘에 약 500, 미국에 690만 세계적으로 흩어져 있는 국민들 다 합쳐 1500여만 정도이니 세계 인구의 0.2%인 소수 민족이나 세계적으로 지성과 경제를 주름잡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일을 하는 민족으로 정평나 있으며 세계적으로 노벨상 수상자는 300명인데 그중 90명이 유대인들이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도 반드시 긍정적인 면만은 아니지만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은 다 유대인들이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커피점만 하드라도 유대인들이 만든 스타벅스가 경영면에서도 단연 우위를 차지해서 비싼 가격인데도 많은 고객들이 몰리고 있다.

 

반면 아랍 사람들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기름 팔아 부자된 나라도 많고 우선 숫적으로 유대인에 비해 절대 다수인데도 유대인들을 당해 내지 못하고 감정적인 표현으로 그들의 울분을 표출함으로서 그들이 유대인으로부터 받고 있는 압박에 대해 합리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견원지간인 유대인과 아랍인은 한 아버지 밑에 서로 다른 어머니의 소생으로 이루어진 민족이며, 성서는 바로 이 문제점을 알리고 있다. 이 문제의 원인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답은 바로 이 작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자기 인생을 시작했기에 신앙인의 산 모델이다.그는 작은 지역의 족장에다 토지와 가축도 넉넉히 있으니 재산 면에서도 명예 유지의 면에도 안정이 확보된 상태에서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떠나 축복받는 인생을 살았기에 교회는 아브라함을 신앙인의 모델로 여기고 있다.  

 

창세기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람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 12;1,4)

 

즉 하느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인생 여정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생길임을 그는 자기 행동으로 보이기에 신앙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그런데 이런 신앙 안에서 축복의 인생을 살게된 아브라함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은 금슬이 좋은 아내 사라 사이에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아무리 깊더라도 이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수치가 되는 것이었다. 자식은 하느님의 축복이기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이유로든 하느님의 축복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그의 아내 사라에게도 관계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듯 이스라엘에서도 여자는 결혼해서 남편의 아들을 낳아주는게 아내로서 기본적인 도리라 여겼기에 사라도 남편을 권해서 다른 여자를 들여서라도 아들을 얻어야 한다는 결정을 했다.

 

오늘 이집트 지역 출신이 젊은 여자 하갈을 후손을 낳아줄 씨받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의 침실로 보냈으며 다행이 하갈은 아들을 낳아 아브라함에게 기쁨을 주었고 이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엘로 불렀다.

 

아무튼 하갈의 출산은 아브라함과 사라, 하갈 모두에게 자신들의 바램이 충족된 좋은 일이었다. 하갈은 비천한 신분의 처지에서 씨받이 역할을 한 아내이지만 아브라함과 만나게 된 것이 찌들린 가난에서 해방되는 좋은 길이었기에 비록 소실의 처지에나마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는 좋은 처지였다.

 

그런데 행복한 문제가 하나 생겼다. 하느님의 뜻에 더 없이 충실했던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늦은 나이에 본처 사라에게서 아들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이가 100세였으니, 금슬이 좋은 부부였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더 없이 기쁜 일이었으나 가정 전체에 새로운 판도를 짜야하는 일이 생겼다.

 

첩인 하갈이 이스마엘을 먼저 낳음으로서 정실인 사라와 아들 이사악의 처지가 미묘하게 되면서 새로운 심리적 문제가 생겼다.

 

하갈은 씨받이 역할을 위해 아브라함의 집으로 왔을 땐 자신의 처지가 본부인 사라의 몸종 수준으로 할 수 있었으나 그가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후부터는 하녀 수준의 자신의 처지가 아들을 낳지 못한 사라와 또 다르게 격상되었다는 생각에 우쭐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고 이것이 사라에게는 부담도 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 후 아브라함은 폐경기가 이미 지나 포기한 조강지처 사라에게서 아들 이사악을 얻게 되는데, 그의 이름이 뜻하는그가 웃는다는 것처럼하느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응답의 확신을 얻게 된다.

 

이때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15세가 되었기에 순서가 바뀐 동생이 생긴 셈이었지만 이 형제 관계는 시작부터 편할 수 없는 관계임이 암시되고 있다.

 

아들 이사악이 자라서 젖을 떼던 날 이들은 당시 풍습대로 이웃 사람을 초청해서 우리 수준의 돌 잔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잔칫날 이사악보다 먼저 태어났기에 명색이 형과 같은 이스마엘이 같이 뛰노는 것을 보면서 사라의 심기는 몹시 불편해졌다.

 

사라는 자기 아들 이사악이 몸종인 하갈에게서 먼저 테어난 이스마엘에게 장자의 순서가 밀리는 불운이 닥칠 것이라는 두려움도 느끼면서 남편에게 하갈 모자를 내어보낼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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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남편 아브라함이 하갈에게 여행에 필요한 물과 빵을 건네며 아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하는 모습이다. 하갈에게는 자기가 누리던 모든 안정성이 다 무너지는 절망의 순간이었다.

 

늙은 남편이나마 그래도 자기 자식을 낳아줬으니 그다음 모든 것은 다 보장받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모든 기대가 다 박살난 것이다.

 

하갈은 자기가 상상도 못했던 매정한 이별을 선언하는 남편 아브라함의 가슴에 기대어 눈물 흘리고 있다. 애초에 애정과는 거리가 먼 늙은 영감과의 관계였으나 그래도 자식을 낳기까지 서로 정이 들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제 이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기에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남편에게 기대어 울고 있다.

 

이 사연을 모르는 아들 이스마엘은 이해할 수 없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뭔가 좋지 않는 일이 시작된다는 생각에 편찮은 모습으로 부모를 바라보고 있다.

 

하갈이 기댄 아브라함의 가슴은 붉은 옷이 있는데, 이 색깔은 아브라함이 하갈에게 지녔던 사랑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 옆에 아들 이스마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빵과 물통을 들고 있으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이 이별의 장면에 마음이 편치않는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자기 가슴에 기대어 우는 하갈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마음 역시 편치 않다. 그러나 그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느님께서 자기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들은 때처럼 묵묵히 순종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명령이라도 하느님의 뜻이면 무조건 순명하는게 도리란 소박한 신앙심에서였다.

 

하느님께서는 착잡한 심정인 아브라함에게 그가 해야 할 분명한 행동 지침을 보이고 있다

 

그 아이와 여종 때문에 언잖아 하지마라.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라. 이사악을 통해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여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한민족이 되게 하겠다.”(창세 21:11-13)

여기서 하느님의 뜻 안에 들어있는 깊은 안배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은 정실인 사라와 이사악, 소실인 하가르와 이스마엘에게 어떤 차별이나 편가림을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모두 보살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다. 상선벌악과 권선징악이라는 인간 사회의 불문율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교회가 주야로 외치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임을 알리고 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의 이런 약속을 굳게 믿기에 극단의 슬픔에 빠져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덤덤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한 손으로 그 모자가 장차 가야할 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지금 서 있는 초목이 우거진 살만한 곳이고 이들 모자가 가야 할 곳은 사막이나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이 모자도 지켜주심을 믿기에 담담히 보낼 수 있다.

 

하가르는 자기의 눈물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스마엘을 데리고 사막을 향해 떠났다. 사막 한가운데 왔을 때 준비해온 물이 다 떨어지자 하가르는 절망 상태에 빠져 아들을 멀직한 곳에 던져 두고 절망의 울음을 터트린다. 아들이 목이 말라 죽는 꼴을 보기 보다 차라리 자기가 죽는게 낫다는 생각을 하며 통곡한다.

 

이때 이 울음 소리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듣고 천사를 보내시어 하가르를 위로하신다.

 

하가르야,어찌된 일이냐? 두려워 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에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일어나 가서 아이를 들어올려 꼭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런 다음 하느님이 하갈의 눈을 열어주시니, 그가 우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우고 아이에게 물을 먹였다.”(창세 21: 14-19)

 

오늘 이스라엘과 아랍 특공대간의 피나는 갈등의 시작을 바로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에서부터 추적해 볼 수 있다. 한 아버지의 혈통이었지만 서로 민족적으로 이질적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두 민족은 몇 세기를 두고 서로 이를 갈며 싸우고 있으나 아직 승부가 결정되지 않은 처지이다.

 

이것은 두 민족간의 원한은 아직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갈등의 해결 방법을 바로 아브라함을 지시하시는 하느님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주신 이사악도 축복하시고 소실인 하갈과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다른 방법으로 축복하신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통해 내리시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그 아이와 함께 하셨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활잡이가 되었다. 그는 파란 광야에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이집트 땅에서 아내를 얻어주셨다.” (창세 21:20- 21)

 

이것을 상기시키듯 작품에서 이스마엘은 등 뒤로 활통을 메고 있다.

 

하느님은 아랍인들에게 유대인처럼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살길을 강요치 않으시고 자기 성정대로 천방지축의 삶을 사는 것을 허락 하신다.

 

하느님은 이스마엘을 이사악처럼 머리를 쓰며 살기를 명령치 않으시고 들나귀처럼 주위와 좌충우돌 하면서 살기를 내버려 두셨다.

 

오늘 유대인들이 고도의 두뇌 회전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있으나 아랍인들은 많은 인구로도 감정적인 폭탄 자살 테러를 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한 아버지 밑에 전혀 다른 두 성정의 아들을 아브라함을 통해 사랑을 보이시는 하느님의 깊고 진실한 사랑에 감읍하게 만들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하느님을 전하는 교회가 이런 하느님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자체 조직 유지에 신경을 쓰다보면 교회가 살아있는 사랑의 하느님을 모습을 전하지 못하고 여러 미사여구로 표현된 하느님의 미라나 박제품을 전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과 이스마엘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볼 수 있으나 교회가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만든 많은 제도와 법을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으로 느끼기 어려운 경우가 비일비재이다.

 

오늘날 교회가 철통처럼 지키고 있는 혼인법이나 다른 여러 제약들을 아브라함을 통해 내리시는 하느님의 뜻대로 처리한다면 인류를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교회로 변모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구약에서 일부다처의 허용이 신약에 와서 일부일처로 파격적인 변화를 함으로서 새로운 상황에서 교회가 어머니 역할을 한 것처럼 오늘 일부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 법을 아브라함의 태도로 접근한다면 훨씬 하느님의 모습이 더 선명히 드러나지 않을까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교회가 갈수록 썰렁해지고 있고, 살기가 나아질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각하다. 물론 이런 원인은 딱히 현실적 교회의 잘못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고 여러 복합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아브라함처럼 사라와 하갈, 이사악과 이스마엘을 다 같은 사랑과 자비의 태도로 대할 수 있을 때 교회가 하느님을 바로 전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혼돈스럽지 않는 참 모습을 보이면서 교회 안에 하느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살아있는 신앙 공간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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