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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밤 : 헤르트헨 토트 신트 얀스(Heertgen tot Sint Jans)

by 이종한요한 posted Jan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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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 성탄밤 (Nativity at Night:1490)

   가 : 헤르트헨 토트 신트 얀스(Heertgen tot Sint Jans.:1455-1495)

   기 : 참나무 목판 (34 X 25.3cm)

소재지 : 영국 런던 국립 미술관 (London National Gallery)



크리스챤 성화의 주제 중 가장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끈 것은 예수 성탄의 주제였다. 예수께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성탄 주제는 크리스챤들에게 가장 관심이 가는 주제이기에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곤 했다.


그런데 성탄은 축제와 연관되기에 축제 성격을 강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많이 표현되었으며 특히 루카 복음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천사,성가족,목동,삼왕들을 그 시대에 맞게 등장시킴으로 성탄의 축제성에 더 흥을 돋우게 만들었다.


성탄을 축제의 성격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해 가능한 것이나 성탄의 의미성을 신앙적 차원에서 분리시켜 지나친 흥행 위주로 만들 위험이 있었기에 현대에 와서 성탄에 으련히 따르기 마련인 축제성에 대해 부정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분위기도 일어나고 있다.


백화점에서 먼저 성탄의 홍보가 시작되는 흥행성이 성탄의 중요한 주제와 같이 왜곡되는 현실에서 성탄 축제성 표현의 비복음적인 문제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축제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성탄의 진면모 제시가 꼭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런던에 있는 영국 국립 미술관은 영국이 자존심을 걸고 있는 명작으로 넘쳐나는 미술관이다. 특히 서양 미술에 있어선 작품의 질과 양에 있어서 대단한 수준의 작품들을 많이 전시하고 있는데, 이 미술관 안내서에 비록 작은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대단한 수준의 작품이라는 안내가 명기되어 있다.


이 작품은 가톨릭 신앙의 풍요로움의 결실인데, 성서의 내용만이 아니라 중세기 스웨덴 출신 성녀인 비리짓다 성녀(Saint Bridget of Sweden(1303–1373)가 기도 중 환시로 본 것을 작품화 한 것이다. 성녀는 스웨덴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역시 고귀한 가문이면서도 경건한 삶을 살던 남편과 결혼해서 8남매의 자녀를 낳고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남편 사별 후 전적으로 신앙에 투신하면서 여러 신비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중에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예수 성탄과 또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자료를 남겼다. 가톨릭 신앙의 풍요로움은 이런 성인 성녀들의 생활에서 체험한 신비 체험도 인정함으로서 신앙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더 하게 되었다.


성서만을 시각화 한다면 천편일률적인 표현으로서 시대착오적인 편협하고 답답하게 표현될 수 있으나 성인 성녀들의 신앙체험을 작품을 통해 여과시킴으로서 성탄 신앙을 더 풍요롭고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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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환시에서 본 성탄은 오늘 우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축제성을 띈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우선 여기에서 아기 예수와 성모님 그리고 천사들이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뒷 편에 성요셉과 목동들이 희미하게 등장하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요란 복잡한 성탄화가 아닌 장식적 요소가 완전히 절제된 모습이기에 성탄의 주인공인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이 더 부각되고 있다. 이 작품에는 빛과 어둠이라는 극단의 대조 안에서 말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님과 천사들의 부대가 중요 부분으로 등장하는 단순한 구도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빛의 중심은 바로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이시다. 보통 성화에 등장하는 빛은 하늘이나 높은 곳에 위치한 창문으로 부터 들어오게 마련인데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몸으로 부터 빛이 나오고 있다. 그것도 단순히 자신의 존재성을 알리는 수준의 빛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존재들에게도 빛을 전달하는 한마디로 빛의 원천으로서 예수님을 알리고 있다.


성모님과 천사들은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받아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면서 주님과의 일치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성서에서 아기 예수는 탄생해서 말구유에 눕혔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말구유 형상은 있지만 아무런 건초도 깔지 않는 형상으로 땅을 연상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비리짓다 성녀가 환시에서 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성녀는 자기 환시에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해산 후 땅바닥에 누인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는데 작가는 이 점을 강조해서 표현했다. 아기 예수님이 땅 위에 누워계셨다는 것은 구세주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을 표현한 것이다.


즉 땅이란 라틴어 단어는 Humus, 인간이라는 뜻의 Human과 겸손이라는 뜻의  Humility의 어원인데, 주님이 자기가 우리와 꼭 같은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은 흙과 같은 허약한 인성에 동참하신 것을 상징하며 인간은 자기의 본질이 흙이기에 인간다움은 겸손으로 표현되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종교는 자기나름대로 겸손에 대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으나 크리스챤의 겸손은  자신의 본질이 바로 흙임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하기에 인간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겸손으로 본다.


우리는 보통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 숨기거니 측소해서 표현하는 것을 겸손으로 여기는데, 이것은 성탄으로 드러나는 겸손이 아닌 왜곡되고 인위적인 겸손이다.


그러기에 실재 삶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크리스챤중에 많은 경우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하고 심하면 왜곡된 모습을 겸손으로 가장되는 안타까움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겸손은 자연스럽고 자유로움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귀한 시원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인간이 하느님과 세상에서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겸손임을 이 작품을 통해 알리고 있다. 작가는 바로 땅바닥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의 모습을 통해 크리스찬적인 인간론의 핵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한 작가는 자기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


성모님은 지금 자기가 해산한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를 통해 세상에 온 아들이 하느님의 성자 예수님임을 알아보고 경배하는 크리스찬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자세로 계신다.


바닥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 역시 방금 태어났기에 미완성의 모습, 즉 어디엔가 엉성한 곳이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갖춘 완성된 존재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의 영성적 혜안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신 분이신데, 그동안 많은 작가들은 신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느 인간과 다른 면을 부각시켜 표현했다.


즉 머리 주위에 후광을 두르거나 아니면 신성의 위엄을 상기시키는 다른 상징들을 도입하지 않고 철저히 건강한 어린이의 모습을 부각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은 건강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제시했다.


신성과 인성은 서로 반대되거나 대비되는 게 아니라 한 인간 안에 조화롭게 드러날 수 있음을 아기 예수의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개신교 신자들의 대종이 성모님에 대한 무지로 성모님의 존재성에 대한 불편심을 가지고 신앙의 내용을 편협하게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비릿짓다 성녀의 환시에 나타난 성모님은 예수님의 신성을 더 없이 믿고 경배하는 자랑스러운 크리스챤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이 성화에 나타나고 있는 성모님의 위상은 하느님의 뜻을 혼신의 노력으로 받아 들이는 크리스챤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을 바로 받아들이고 나면 개신교 신자들의 착각 수준의 무지가 신앙의 성장에 얼마나 방해가 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가톨릭 신앙의 심원하면서도 인간적인 면을 너무도 시원하게 표현하는 일방, 그 인성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신성 역시 조화롭게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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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빛을 성모님과 천사들이 응시하고 있다. 천사들과 특히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에게서 발산되는 빛을 듬뿍 받아 시편 작가가 노래하는 대로 자기 안에 하느님이 임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여기서 비리짓다 성녀의 성탄의 영성, 즉 예수님이 우리와 꼭 같은 인성을 취해 오심으로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은 그분의 신성에 동참하게 됨으로서 예수님의 성탄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이 탄생하신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축제임을 표현하고 있다.


신인합일(神人合一) 이라는 크리스챤 영성의 핵심을 너무도 명쾌히 표현하고 있다.

크리스챤 삶은 성모님처럼 예수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사명임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은 작품을 통해 다른 어떤 성탄 성화도 제시하지 못했던 빛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라는 신학을 너무도 평범하면서도 명확히 표현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세상의 어둠을 깨트리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탄 신학을 정확히 표현한 한편의 시각적 명강론으로 볼 수 있다.


성탄 낮 미사를 끝내면서 가톨릭 전례는 예수님의 성탄 신학을 요한 복음 서문을 복음으로 묵상하는 것으로 완성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와 외아드님으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1,9;14)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우리가 크리스챤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만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빛을 받았을 때 가능한데, 이 작품은 성탄 신앙의 핵심 즉 주님께서 너무도 우리를 닮은 모습으로 오신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성탄절이 먼저 소비와 향락의 중심인 흥행가와 백화점에서 오는 것처럼 교회의 성탄절 역시 세상의 시류에 편승해서 너무 행사 위주의 요란을 떠는 모습이 서글픔으로 다가오고 있다.


성탄절을 흥청스럽게 경축하기 위해 성탄 준비 기간인 대림절의 의미가 점점 위축되고 대림절이 성탄절에 잠식되고 있는 분위기가 지배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이 작품이나 이 작품 제작에 큰 역할을 한 성녀 비리짓다의 성탄 영성은 오늘날 행사성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성탄 분위기에 제동 역할을 하면서 성탄의 참 모습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음으로서 그분의 신성을 세상에 보일 수 있는 현실적으로 꼭 필요한 지혜를 전하고 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크리스챤이 해야 할 복음적 증거임을 이 작품은 제시하고 있다.


성탄시기에 바치는 다음 입당송은 이 작품을 응시하는 사람에게 행사와 상업성에  함몰된 현대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예수를 닮은 모습을 보이는 삶이 바로 크리스챤 삶의 정확하고 구체적인 모습임을 알리고 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이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주님 당신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내려 왔나이다”(지혜 18:14-15)


작가와 비슷한 시기에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베뇨죠 고골리가 남긴 “삼왕의 경배”라는 작품은 예수 성탄을 당시 피렌체의 부호로서 정치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던 메디치 가문의 영화를 과시하기 위한 의도성 작품으로 예수의 성탄 이야기가 메디치 집안의 영광 안에 함몰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현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온 세상으로 퍼진 성탄의 상업성 축제 의식에 대한 반성을 하게 만들며 건강한 성탄 신학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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