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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속의 방랑자 (1817) :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1774- 1840)

by 이종한요한 posted Oct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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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방랑자.jpg


제목: 안개속의 방랑자 (1817)

작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1774- 1840)

크기: 켐퍼스 유채 : 98 x 74 cm

소재지: 독일 함브르크 시립 미술관 (Hamburg)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기 시작하고 도시가 산업화의 중심지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연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키우게 되었으며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현실에서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오늘 산업화가 우리에게 준 풍요와 그리움은 이제 지구의 온난화 현실과 직결되는 재앙과 연관되는 것이 확인되면서 이제 정서적인 관점에서 보다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위기를 피하는 실리적인 관점에서 자연적인 것에 대한 실천적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인간의 삶을 안락하고 편리하게 만드는 인공적인 것에 대한 매력이 대단했는데, 이제는 좀 불편하더라도 자연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이 대세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자연에 대한 그리움은 건강과 심리안정의 차원에서 새로운 관심과 매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시기엔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한 풍경화가 단연 관심을 끌게 마련이며 동양의 산수화나 서양의 풍경화는 실내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자연 감상의 좋은 자료로 제시되고 있다.

 

이처럼 풍경화는 자연을 대하기 그리 쉽지 않은 현대 세계에서 자연스러운 동경으로 등장하고 있다.

  

     성미술에 있어서 풍경화는 성화(聖畵)와 속화(俗畵)의 구분에서 당연히 속화를 취급되면서 성화는 하늘의 아름다움을, 속화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준 정도로 여기에 되었다.

 

카톨릭 성화에서 주제는 당연히 예수님 성모님 성인들 그리고 성서에 나타나는 사건들의 묘사가 전부였기에 풍경화는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특히 동방 교회 성화에서는 이것이 더 엄격히 표현되고 있다, 동방교회는 예수님의 동방교회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Orthodox 교회라는 명칭 속에 이미 이것을 품고 있다. 즉 거룩한 성화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성화 차원에서는 속화로 취급하게 되었다. 성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도 그 규정을 정확히 정함으로써 성화의 구분을 명백히 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다행스럽게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적인 것의 강조와 세상적인 것에서 상징성을 발견함으로서 장식적 차원에서 자연을 배경에 넣기도 하고 또 꽃이나 열매를 상징적인 표현으로 사용함으로서 천상의 사건과 지상의 현실의 어떤 연결고리를 찾고자 했다.

 

      작가는 18세기 후엽 독일 북부 항구도시에서 경건한 루터교 신자이며 자녀들에게 현명한 교육을 시키는 밝은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했다

 

7살 때 병으로 어머니를 잃고 사랑하는 여동생이 병으로 사망하고 13살 때는 썰매놀이를 하던 여동생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얼음 구덩이에 빠져 사망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심리적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런 어린 시절에 당해야 했던 충격적인 사건들이 그를 평생 우울증, 대인기피증,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형성된 그의 예술 세계 역시 밝은 면 보다는 우울하고 염세적인 경향을 띄게 되어 일생 인물화나 역사화는 그리지 않고 자연을 소재로 한 풍경화를 그리며 그 한 가운데 한 인간을 둠으로써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정확한 태도를 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 세계는 인간 관계의 즐거움 보다 자연을 관조하는 방향으로 자리잡게 되어 주로 대자연의 신비와 숭고함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켰다. 이렇게 자연을 아름다움을 종교적인 것으로 승화시킨 내면에는 그의 개신교 신앙도 중요한 몫을 하게 되었다.

 

그가 믿은 루터교는 칼빈교와 달리 성화나 성물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편이긴 하나 가톨릭적인 성화에 대해선 심리적인 거부 반응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에 결국 성화에 대한 표현을 가톨릭과 달리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위엄과 섭리를 찬양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작가는 자연스럽게 자연의 심취를 통해 종교적인 숭엄함을 표현하게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뚫고 바위에 오른 한 남자가 지팡이에 기대어 안개 바다 위로 솟은 산과 바위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인물과 바위는 어두운 색으로 자세히 묘사했고 멀리 있는 안개와 산과 바위는 흐릿해지며 회색빛으로 변하게 하는 원근법을 쓰고 있다. 이것은 동양화의 기법처럼 관람자를 현실감에서 벗어나 신비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안개로 덮인 산을 하느님의 작품 전시장으로 보았기에 이것을 감상하는 인간의 뒷면을 보임으로써 이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자연을 통해 하느님을 발견하게 초대하고 있다.

 

작가는 광활한 자연을 대면한 인간의 낭만적 정서 신비적이고 종교적 감정을 풍경화를 통해 잘 표현했다. 이 작품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관계에 대한 내적 통찰을 보여주고 자연에의 심취를 통해 하느님을 향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산업혁명으로 인간이 과거에 상상도 못했던 편리하고 안락한 환경을 만들면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단단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연의 정복이 곧 인류의 바람직한 변화와 성장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예술 표현에서는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가 시작되는데, 이중 낭만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역량에 자기 도취해 있는 순간 빠질 수 있는 기계문명의 허상을 제시하며 종교적 경건성의 신비스러운 영역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그의 일생을 어우르며 낭만주의적 풍경만 그렸으며 이것을 통해 자연을 항상 변화를 겪는 인간에 대해 변치 않는 이상과 영원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표현했으며 자연에 숨겨진 신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이것을 인간에게 전달함으로써 전통적인 성화처럼 인간 중심의 작품이 아닌 하느님의 창조의 전시장인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에 눈뜨게 만들었다.

 

가톨릭이 성서나 성인들의 삶을 성화의 주제로 삼으면서 신앙의 내용을 전달하는 좋은 도구로 사용했다면 개신교 신자들은 풍경화를 하느님의 만날 수 있는 좋은 도구로 이용한 것은 가톨릭과 다른 관점에서 하느님께로 향하게 만든 좋은 시도라 볼 수 있으며 개신교 영성의 탁월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서 특히 시편에는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을 많이 볼 수 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네.’ (시편 19)

 

작가는 저 신비스러운 자연 앞에 섰을 때 정확히 자신의 실상을 발견할 수 있고 세계에 대한 성찰과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삶의 설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개 속의 방랑자.jpg

 

     안개 자욱한 산위에 서서 구름으로 덮힌 앞을 바라보는 작가의 모습은 구약에 나타나는 엘리야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형제들이 불의의 사고로 차례로 죽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의 마음은 큰 슬픔으로 내성적이며 도피적인 성격으로 변모된 작가와는 달리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는 불같은 열정의 소유자로 하느님을 세상에 전하고픈 열망으로 바알 잡신을 믿고 있는 이세벨과 대결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세벨의 복수로 쫓기는 몸이 되면서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자각하게 된다.

 

하느님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그에게 닥친 것은 살해의 위협뿐이었고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한 채 쫒긴 몸이 되면서 그는 뼈저린 소외감과 고독을 느끼게 되어 하느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는 하소연을 하게 된다.

 

전적으로 믿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하느님께 역설적으로 자기의 현실이 너무 괴로우니 죽여달라는 하소연은 신앙인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의 현실이라 볼 수 있기에 자기 탓이 아닌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통과 슬픔을 당한 작가가 결과적으로는 같은 모습이다.

 

이런 하소연을 하는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는 나와서 산위 주님 앞에 서라(열왕기 상 19,12) 고 명령하신다.

 

엘리야가 이렇게 하자 그때 바로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서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렇나 주님께서는 불속에도 계시지 않으셨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여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자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 동굴 어귀로 닥아 섰다 그러자 그기에서 한 소리가 들려 왔다,‘ ( 열왕기 상 19, 11- 13)

 

이것은 불같은 열정의 사나이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난 순간의 감동적인 모습이며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뛰어넘는 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작가나 엘리야나 이런 면에서 결과적으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자리로서의 지혜를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인간적 고독이나 소심함으로 폐쇄된 마음으로 산에 올라가 안개에 뒤덮힌 산을 바라보면서 자기 앞에 펼쳐진 현실에 대한 관조를 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등을 관객들을 향해 등장하는 인물은 자기가 나아가야 할 인생 길을 찾고 있는 구조자의 모습이다.

 

실재적으로 현실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맞춤형 인간과는 거리가 먼 이 세상의 가치 이상을 찾으며 살아가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모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을 무시하기에 적응이 어려운 인간이 아니라 세상 이상의 가치를 보여주는 종교적 인간의 초월성을 전하고 있다.

 

누군가가 인생은 하느님을 찾는 나그네로 표현한 것처럼 작가도 이 인물을 통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의 여정을 알리고 있는데, 이 여정이란 안개에 덮힌 산처럼 그 실체가 쉽게 드러나지 않게 마련이기에 끈질긴 집념으로 앞을 바라보면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마치 엘리야처럼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삭막한 침묵을 내딛고 산을 오름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확인한 엘리야와 같은 모습이다.

 

     이 작품은 가톨릭의 성미술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좋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처럼 예수님과 성모님 성서에 드러난 모습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작가처럼 일상 삶에서 만날 수 있는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배우기 노력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더 풍요로워 질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일방적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상기할 수 있는 성화만을 찾게 될 때 신앙이 발달 미숙의 편협한 상태에 머물기 쉽다. 신앙이 하느님께 빌고 은혜받는 체험으로 계속 이어진다면 신앙은 유치한 인간을 미숙한 차원에 묶어두기 쉽다.

 

그렇나 작가처럼 세상과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수행이 생긴다면 신앙은 훨씬 더 인간적이고 성숙한 만남의 자리가 될 것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앞을 보라고 초대하고 있다

 

야훼의 산으로 오를 이 누구인고? 거룩한 그곳에 서있을 이 누구인고 ?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이 헛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시편 23)

 

크리스챤 삶에서 산이나 자연에의 접촉은 단순한 여가 선용이나 현실 삶에서 만날 수 있는 피로 요인을 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기본적인 준비이다. 풍경화에 자신의 인생과 신앙 체험을 담다 작품으로 승화시킨 이 풍경화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또 다른 표현의 좋은 성화이다.

 

크리스챤들이 큰 사랑과 신심을 담아 부르는 이 성가는 작가의 작품과 어울리는 좋은 성가로 볼 수 있다.

 

(가톨릭 성가집 2)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크시도다 주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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