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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보(Bavo) 성당 1636: 피테르 얀스 산레담(Peter Jansz Saenredam, 1597-1664)

by 이종한요한 posted Jun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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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 바보(Bavo) 성당 1636

작가 "피테르 얀스 산레담(Peter Jansz Saenredam, 1597-1664)

크기 :목판 유채 96 X 57cm

소재지 :네델란드 암스텔담 미술관

  

     오늘 산업사회가 발달되면서 종교는 관심의 뒷견으로 제쳐지게 되었고 성당 건축 역시 과거에 비해 훨씬 적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세기에 건축된 여러 성당들이 외적으로는 관광 문화 자원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타 종교에 비겨 상대적으로 탁월하게 회화와 건축에 있어 독창성과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다. 시대와 지역 상황에 따라 너무도 다양한 양식의 성당을 건축함으로서 가톨릭 신앙의 풍요로움을 전해왔다.

 

성당은 전례의 공간이기 이전 하느님께 봉헌된 것이기에 최고의 정성을 다해 건축되었고 그러기에 성당은 시대를 초월한 작품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작품의 작가인 "피테르 얀스 산레담(Peter Jansz Saenredam, 1597-1664)은 네델란드 하를렘의 성 바보 성당(St. Bavo in Haarlem) 내부 모습을 그린 연작 시리즈를 남겼는데, 이 작품을 통해 종교개혁에 의해 성당이 개신교회로 변했다가 어떤 연유로 다시 성당으로 돌아오고, 또 어떤 것은 개신교도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다가 복원된 것도 있는데 이 성당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화란이 개신교인 칼빈주의자들 손에 접수되면서 많은 성당이 무참한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1566년 칼빈 주의자에 의해 성상 파괴운동이 일어나기 전 이 성당 안에는 여느 성당들처럼 많은 성화를 그린 벽면과 성당을 돌아가면서 36개의 제단이 양쪽 통로에 있었지만, 성상 파괴운동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을 우상으로 치부하는 광적인 개신교도에 의해 다 제거되면서 성당은 텅빈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개신교도들이 성당의 성상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성서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는 그들에게 안타깝게도 문화현상이나 아름다움의 원천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편견 중에 광신적 종교의 표현이 만든 것 만큼 저질스러운 것도 없는데, 종교개혁 후 교회가 보인 치부의 하나가 바로 종교 예술에 대한 무지한 이해로 볼 수 있다또한 가톨릭 교회의 책임이라면 지나치게 성상이나 성화를 강조함으로서 신앙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것과 함께 신앙의 본질에 혼돈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적인 견해에 의하면 가톨릭은 이런 위험 보다는 그것이 가져올 선익의 관점을 더 강조했기에 성당 건축이 단순한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의 확보가 아니라 그 안에 여러 적합한 예술 표현으로 신자들이 하느님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는 차원을 더 강조했기 때문이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의 영향과는 다르게 거의 독창적으로 발전한 네델란드 예술은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에 와서 만개했고, 17세기는 네델란드 미술의 황금기였다.

 


   작가는 종교개혁으로 개신교와 가톨릭이 갈라져 긴장을 보이던 시대 화란에서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심취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고 특히 성당 건축에 관심을 가져 성당을 많이 그렷다.

 

그는 건물을 상상에 따라 묘사하는 전통화법을 버리고 정확히 그리는 새로운 사실주의를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다.

 

작가가 그린 이 성당은 성상 파괴주의자들인 개신교도들에 의해 내부의 전체가 파괴되었으나 개신교도들이 물러간 후 다시 가톨릭 성당으로 복원 된 것이다.

 

이 파괴된 성당을 인수받은 가톨릭 신자들은 경제적인 여유가 넉넉지 않았기에 이 성당을 원래대로 복원치 못하고 그냥 성당의 전례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돈했으나 그래도 성상과 성화가 신심 생활에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가톨릭 성미술의 분위기를 키우기 위해 고심 노력했다.

 

또한 가톨릭 신자들도 과거처럼 성상과 성화로 아우러진 화려한 성당은 개신교적인 질책의 대상으로서 만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어떤 의미에서 개신교도들은 견해 중에서 받아 들여야 할 것은 받아 들인다는 절충안적 사고방식으로 이것을 수용한 가톨릭 신앙의 폭넓은 견해를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의 원천이시며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표현하기 위해서 개신교도들처럼 텅빈 공간의 성당은 상상 할 수 없고 이 텅빈 공간을 가톨릭 적인 처리를 통해 가톨릭 신앙 표현의 정당성을 표현코자 했다

 

휑한 성당안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머물고 있다성당 분위기에 어울리는 기도를 하거나 다른 경건한 표정과는 달리 그냥 바깥 공간에서 하던 자세를 성당안으로 옮겨놓은 그런 분위기이다

 

먼쪽에는 칼은 찬 사람과 주위를 서성대는 남성 몇이 보이고 이쪽에는 기둥을 의자 삼아 앉아 있는 부인을 중심으로 가족으로 보이는 소년과 어린이를 포함한 몇 명이 있다.

 

이들은 모두 기도를 목표로 한 성당의 분위기가 아닌 관광의 수준이나 아니면 휴식의 자세로 머물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기발하면서도 상황에 맞는 가톨릭 성당의 바른 면모를 제시하는 것이다. 


성서의 내용이나 성인들의 삶을 재현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혐오하는 개신교도들이 파괴한 이 성당은 겉으로 보기는 개신교 교회당의 모습이 되었으나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톨릭 성당이 제시하는 중요한 상징, 즉 이곳이 하느님의 집임을 알리고 있다.

 

대성당을 부를 때 두오모( Duomo. Domus)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집이란 뜻으로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의 집이란 뜻이다. 유명한 밀라노 대성당이나 독일의 쾰른 대성당은 다 두오모로 불리는데, 이것은 가톨릭 성당의 특징을 너무도 잘 표현하는 것이다

 

성당은 예배를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간이기에 여기에는 그 자녀들을 모두 포용하는 공간이다. 즉 하느님의 자녀들인 신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러기에 중세기 대성당은 항상 도시 중심에 있으며 그 주위에 사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공서나 시장이 있었다. 한마디로 신자들의 삶을 모두 안아주는 공간이 바로 성당임을, 어머니의 품같은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기에 어떤 죄인이나 정치범이 성당으로 들어가면 경찰이 들어가서 체포하지 못하고 기다려 주는 것처럼 삶의 절박한 순간의 인간들에게도 은신처가 될 수 있는 곳이 성당이다.

 

이 장면에서 이 성당은 바로 전례가 끝난 시간이기에 몇 명의 시민들이 서로 다른 목적으로 성당에 머물 고 있다.

 

작가는 휑한 성당 공간에 몇 사람을 등장시키면서 산만하거나 무의미한 느낌을 주지 않고 한 곳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이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즉 부인과 함께 있는 사내 아이는 사내다운 호기심으로 저편을 걷고 있는 칼을 찬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사내아이에게 있어 칼을 찬 남자는 너무 흥미로운 존재이기에 그는 그곳이 성당임도 잊어버리고 이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이 소년의 시선을 아량곳하지 않는 자세로 위에 보이는 올갠으로 눈길을 두고 있다한마디로 소년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칼 찬 사나이로 옮기고 이 사나이의 시선을 위에 있는 올갠에 둠으로 서로 연작으로 신앙의 본질에 접근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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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올갠은 작가가 제시한 가톨릭 신앙의 상징이다. 개신교 예배에서도 올갠은 사용되었으나 작가는 가톨릭 전례에 있어 부르는 성가는 소위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찬송가와 다른 수준의 전례의 표현이며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처럼 성가는 기도중에 가장 고귀한 기도의 표현이며 그러기에 성가를 부르는 것은 두 번 기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개신교 신자들도 예배 공간에 올갠을 두었기에 이 성당의 올갠은 파괴하지 않았으나 작가는 이것을 작가의 특유한 재치로 꾸며 하느님께 최선의 것을 바치는 상징물로 올갠을 대치했다.

 

성체 공경을 하지 않는 개신교도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가톨릭 성당의 핵심인 성체를 모신 감실을 표현하지 않고 개신교도들도 사용하는 이 올갠을 표시한 것은 작가의 지혜로운 배려로 볼 수 있다.


성당 내부가 너무 담백한 것과 대조적으로 이 올갠은 금색으로 장식되어 돋보이는 것과 동시에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요, 모든 자녀들을 포용하는 집임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바로 이런 정서에 착안하여 소년은 칼 찬 사내를 응시하고 사내는 위에 있는 올갠을 응시하는 연결고리적인 표현을 통해 미사의 감사송에 나오는 마음을 드높히라는 표현의 새로운 시도로 이곳이 하느님의 집이며 하느님과 그 자녀들이 인간이 서로 만나는 공간임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 올갠을 통해 가톨릭 신앙의 탁월함을 유연히 표현했다.

 

서로를 분리시키는 교리 논쟁이나 비판이 아니라 올갠이라는 서로의 공통 분모안에 있는 차이성의 표현을 통해 가톨릭 신앙의 탁월성을 전하고 있다.

 

성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지닌 개신교도들에게 가톨릭 성화를 소개하면서도 여기 예수 부활상이 있는 것은 작가의 소박하면서도 강인한 신앙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즉 지금 종교개혁으로 가톨릭 교회가 좀 위축된 것 같으나 이것은 일시적 현상이고 언젠가 다시 과거처럼 부흥하리란 자기 신앙의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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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개신교도들과 가톨릭 신자들간에 있을 수 있는 심리적 충돌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세심히 노력하면서도 가톨릭 신앙의 우위성을 옹호하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 즉 가톨릭 교회가 현실적으로 개혁파들의 공격에 의해 위축된 현상을 띠고 있으나 언젠가 승리하리라는 소박한 신앙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표현했다신앙인이 지녀야 할 자부심을 대결이 아닌 화합의 차원에서 표현했다.

 

작가는 나름대로 가톨릭 신앙표현의 특성과 장점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으며 작가는 이런 작품을 많이 제작하면서 화란 현실에서 가톨릭 성미술을 통해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신앙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전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작가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는 현실에서 서로의 감정을 건드려 미움과 불화를 조장할 수 있는 호교적이며 방어적인 표현을 자제하면서도 가톨릭 성당의 기품있는 아름다움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면이다.

 

인간적인 모든 선의를 다 포용하는 가톨릭 교리를 미적인 차원으로 까지 승화시켜 개신교적인 표현에서 가톨릭으로 전화시키는 과정에서 조화로운 화합을 찾았다는 것은 참으로 대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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