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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고 명상하시는 성 프란치스코 : 엘 크레코 (El Greco)

by 이종한요한 posted Oct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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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 성 프란치스코 2.jpg


제   목 : 무릎을 꿇고 명상하시는 성 프란치스코(1595)

   가 : 엘 크레코 (El Greco:1541- 1614)

   기 : 캔버스 유채 (147.3cm X 105.4cm)

소재지 : 미국 샌프란치스코 미술관  



성 프란치스코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이제 교회와 세상 안에서 너무도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영성적인 힘을 말할 때나 교회가 방향을 잃고 혼돈 상태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 때 항상 프란치스코의 길을 가라고 안내하고 이것을 설득력을 지닐 만큼  이제 성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심볼 마크처럼 등장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극심한 자연 파괴의 재앙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삶에서 그가 보인 자연에 대한 사랑의 태도에서 해답을 찾으라고 외치고 있다.


근래에 예수회 출신의 교황이 프란치스코의 이름으로 사목을 시작하면서 프란치스코를 연상시키는 그분의 사목적 태도는 혼란한 시대 전 세계 인류를 인도하는 등대의 역할이 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신뢰를 주고 있다.


작가가 활동하던 종교개혁 이후 교회가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새로 태동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했던 반종교 개혁 시대에 작가는 성화로서 이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작가는 예술가이기 이전 가톨릭 신자로서 당시 교회의 부패로 종교가 분열되는 것을 몹시 마음 아파했으며 종교재판 같은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반대하거나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종교재판과 같은 방법이 아닌 자기정화의 차원에서 시작된 반종교 개혁 운동을 적극지지 하면서 자신의 예술 활동이 바로 이런 운동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향되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작가는 교회 쇄신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표현한 성인으로 성 프란치스코와 사도 성 안드래아와 사도 요한을 등장시켰다.


사도 요한을 등장시킨 것은 그가 막둥이 제자로서 다른 선배들이 갈팡질팡 주님을 배신하는 삶을 살 때에도 한결 같이 주님 곁을 지킨 순수함의 상징으로서 선택되었고 성 안드레아 사도는 좀 특별한 인연으로 되었다.


당시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교황이 너무도 부패하고 덕이 없기에 넌덜머리는 낸 신자들이 자연스럽게 베드로의 형인 안드레아를 개혁의 기수로 선택했다.


작가가 그린 사도 베드로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배반하리라는 주님의 말을 듣고 펄쩍 뛰며 부인했다가 주님이 체포되시는 것을 보자 겁에 질려 자신도 주님처럼 끌려 갈까라는 두려움에 주님을 배반하고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보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작가에게 있어 다른 성인과 비길 수 없는 거의 유일한 성인이기에  일생을 통해 성인의 많은 모습을 그렸으며 지금 남아 있는것만도 대강 27점의 작품이 있다.


작가가 그린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대강 다음과 같다


이 작품처럼 황홀경에 빠진 성 프란치스코

성 요한 복음사가와  사도 성 안드레아와 프란치스코

레오 형제와 죽음을 묵상하는 프란치스코

오상을 받으시는 성 프란치스코 등으로 


특징은 그분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거두절미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만 일방적으로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떤 성인 못지않게 사도적 활동도 많이 하셨으나 이런 것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것은 작가의 심원한 의도였다.


작가는 당시 교회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면서도 일반 귀족이나 정치인들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삶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의 천상적 면모를 제시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뜻 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교회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선 성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천상적 모범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당시 교회 수준에 걸맞는 한편의 강론이었다.


십자가를 응시하는 프란치스코.jpeg


성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자주 동굴을 기도처로 사용했다는 것이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도 동굴로 보이는 곳에서 기도 삼매경에 빠져 앞에 놓인 성물을 응시하고 있다. 앞에는 성서와 십자가 그리고 해골이 놓여 있다.


해골은 프란치스코 이전부터 죽음 묵상의 주요 재료로 사용되었고 성서와 십자가는 프란치스코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성서와 십자가는 다른 성인들의 삶의 묘사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지만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영성의 주요한 주제였다.


성 프란치스코의 그리스도 이해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였다. 마르코 복음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여기느냐? 라고 질문했을 때 다양한 대답이 나왔듯이 역사 안에 교회에 나타나고 강조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로 그 시대의 영성을 표현하고 있는데, 성 프란치스코 이전 그리스도는 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었다.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승리와 성공이라는 주제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도 이런 그리스도가 강조되기 시작했기에 교회 안에 “금관을 쓰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정착되면서 성직자들의 부패가 서서히 시작되고 교회는 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이전에부터 그리스도의 인성이 강조되면서 이런 경향을 띄기 시작했으나 성 프란치스코는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인간에의 사랑을 극심한 고통으로 표현한 그리스도로 표현했다.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에 바치는 저녁기도의 성경소구에 나타나는 다음 성서는 성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너무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실상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게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앞으로 아무도 내게 괴로움을 끼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육신에 예수의 상혼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갈라6:14-17)


작가는 이런 성인의 십자가 중심의 영성 오로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성인의 순수하고 열렬한 삶의 모습을 이런 십자가를 응시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중세 교회는 십자가 중심의 영성을 망각했기에 성직자들은 권력자처럼 처신하면서 예수의 생명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잘 꾸며진  무덤의 역할을 하면서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 교회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길로서 십자가 중심의 영성을 성인의 모습을 통해 표현했다.


그다음 성서는 성 프란치스코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데 가장 큰 힘, 더 나아가 유일한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이다. 개신교가 가톨릭에 반발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가톨릭 교회는 성서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옳은 말이면서도 프란치스코의 존재성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철저히 성서적 바탕에 기초한 삶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성서학을 전공한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서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태도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의 수도생활은 복음의 정수를 표현한 단순하고 기쁜 생활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 점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이 몇몇 형제들을 나에게 주신 후 아무고 내가 해야 할 것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樣式)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유언 14)


작가는 이런 성 프란치스코의 표현을 통해 끊임없이 교회를 개혁하고 쇄신 시킨 개혁자로서 성인의 표현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이런 성서적 바탕과 건강한 그리스도론은 당시 부패의 나락에 빠진 교회에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중세 교회의 바탕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으나 교회의 부패에 물들지 않고  신선한 생명력을 선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 역시도 자기 회칙에서 교황에 대한 순종을 강조했으나 교황을 통해 복음을 살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강조이지 결코 부패한 교회를 맹종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실천도 하지 않았다. 그의 교황에 대한 순종은 복음에 대한 순종이지 결코 교황의 잘못된 생각에 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많은 성인들도 교황이 협조를 강조하는 십자군 전쟁이나 이슬람 교도들과의 투쟁을 미화하고 격려했으나 놀랍게도 성 프란치스코는 이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오히려 이슬람 교도들과 대화한 유일한 교회 성인이었기에 오늘까지 교회의 체험을 살려주는 성인으로 남게 되었다.


작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삶이 가장  순수한 복음적 삶이며 혼란스러운 교회가 가야 할 방향제시를 바로한 성인으로 믿고 있었기에  이 잘품을 통해 신앙의 혼란기를 살면서 방황하느 신자들의 마음을 잡아줄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하는 예슬을 통한 신앙 증거를 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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