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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율리오 2세(1511-1512): 라파엘(Raphael)

by 이종한요한 posted Oct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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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_Julius_II.jpg


제목교황 율리오 2세 (1511-1512) 

작가라파엘 (Raphael)

크기유화 108 cm × 80.7 cm

소재지영국 국립 미술관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주님께서 교회 으뜸으로 뽑으신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여기고 있다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66대 교황이시니 교황직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장수한 지도체제이다.

 

오늘 교황직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의 위치가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겪고 있는 인류에게 가야할 길을 제시하는 인류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꽈리를 틀고 있는 소수의 근본주의적인 사고를 지닌 개신교도를 제외하고 교황은 신자와 비신자의 상관 없이 모든 인류가 최종적으로 희망을 두어야 할 지도자의 위치를 인정 받고 있다.

 

작년 타임지가 선정한 현대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100대 지도자의 한명으로 교황 프란치스코가 뽑혔다그런데 이중에는 정치 경제 학문 등 여러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망라된 것인데급변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인류의 지도자의 역할로서는 교황님이 첫째라는 것이 결코 왜곡된 생각을 아닐 것이다.

 

교황님의 위상에 대해 이제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교황님의 지도력은 온 세계 인류에게 인정을 받으며 큰 신뢰를 주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 모든 교황님의 위상이 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특히 우리가 고등학교 수준의 세계사를 배운 사람들이라면 정확히는 몰라도 중세기 교황 중에는 부도덕하고 정신적 지도자로서 부적격자들도 있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본인의 성화해설에서 교황의 초상화로는 베네치아 화가인 티치아노가 그린 바울로 3세 교황의 초상화가 소개되어 있는데여러 교황들중 바울로 3세 교황과 오늘 소개하는 율리오 2세 교황은 전형적인 중세의 어두운 삶을 살았던 교황들이다

 

바울로 3세는 자식이 있는 몸으로 교황이 되었고 그의 아들 역시 추기경이 되었다그러나 그는 교황이 되기 전 자신의 실수를 정확히 인정하고 교황직에 오르고선 당시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풍지박산이 된 가톨릭 교회의 자체 정화와 함께 개신교의 유입을 막기 위해 현명한 노력을 했던 교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마디로 비록 인간적 실수는 했으나 교황으로서는 더 없이 지혜롭고 인격적인 처신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파르네세 역시 자식이 있는 몸으로 추기경직을 맡았으나 원채 자질이 있고 인품이 좋아 교황 선거가 있을 때 마다 교황 물망에 올랐지만 조용히 교황직을 사양하면서 교회에 필요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라파엘로가 그린 율리오 2세는 중세 중세기 교황 중에서도 최고로 부패한 교황직의 한 가운데 살았던 교황이다중세 교황들 중 최악의 교황은 알렉산더 6세 교황(1492- 1503)이었고 율리오 2세 교황은 알렉산더 교황 다음인 비오 3세 교황이 불과 재위 26일만에 선종하자 이어 교황직에 올랐다.

 

그는 알렉산더 6세 교황과는 앙숙 관계였으며 그의 재위 중 자신의 신분에 불이익이 닥칠 것을 우려해 은신하다가 그가 교황이 되자 알렉산더 교황의 아들로서 대단한 권한을 행사하던 보르지아와 그 잔당들을 처단함으로서 자기 세계를 바로 구축했다.

 

알렉산더 6세 교황은 교황사에서 가장 사악하고 부도덕한 교황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율리오 교황 역시 전임자와는 다르지만 평판이 좋지 못한 교황으로 처신했다.

 

이태리 북부 제노바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양털깍기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율리오 교황은 그의 삼촌인 식스토 4세가 프란치스코 수도회 총장에서 교황이 되자 팔자가 트이게 되어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그는 성격상 과대 망상증에 사로 잡혀 있었고 어려운 가정 출신이 교회 고위 성직가가 되면 흔히 빠질 수 있는 자기 가문의 명예와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음으로써 모든 신자들의 목자로서 지녀야 할 교황의 품위에 먹칠을 했다.

 

그는 또한 오늘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어려운 전쟁광(戰爭狂)으로서 교황령을 넓히기 위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가 몸소 갑옷을 입고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것 역시 로마 제국의 역사를 알아야 이해 할 수 있다로마 제국이 5세기에 망하면서 로마는 치안 정치의 공백상태가 되고 보니 교황이 자연스럽게 로마의 군주로 처신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덕이 부족한 교황들은 많은 문제를 만들게 되었다.

 

과시적 성격이 대단히 강한 교황은 당시 우르비노 출신으로 피렌체를 거쳐 로마에 정착해서 너무도 아름답고 사량스러룬 그림을 그려 평판이 좋은 라파엘로에게 자기 초상화를 의뢰했다.

 

율리오 교황 주위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는데라파엘로는 성격이 온화하고 사교적이기에 율리오 교황과도 사이 좋게 잘 지냈으나 미켈란젤로는 그 역시 대단히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율리오 교황과 대단한 애증 관계 속에 긴 세월을 함께 보내야 했다.

 

이 작품이 유명한 이유는 교황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해서 마치 나무판에 그려진 사진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교황이나 왕들의 초상화는 어느 정도 각색을 했고 또 실물 보다 아름답고 젊게 보이도록 그리는게 관례였는데작가는 교황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그림으로서 초상화 제작에 새로운 경지를 구축했다.

 

이 초상화의 특징은 율리오 교황이 살아 있을 당시 동시대인들이 보고 깜짝 놀랐다는 점즉 실물과 똑같다는 데 있다작가인 라파엘로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던 르네상스 화가답게 대담하게도 율리오 2세를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이 초상화는 어느 면으로 봐도 교황이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극히 괴팍한 늙은이 모습이다불만에 가득찬 듯 꼭 다문 입과 늘어져 실룩거리는 볼 등 초상화 속의 그는 대단히 완고해 보이는 고집쟁이 늙은이의 모습이다교황이 일생 동안 여느 교황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쟁광과 싸움꾼으로 보인 이미지를 한눈에 드러내고 있다.

 

크리스챤이 아니면서도 로마제국의 역사와 교황에 대한 글을 남긴 일본 작가 시모노 나나미를 신의 대리인”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던 정의라 믿고 자기가 믿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계시하고 확신하며 산다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자신들은 그 계시를 지상에 구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들의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한다.“

 

실제로 율리오 2세는 하느님의 대리인인 교황답지 않게 난폭한 성격의 독재자였다전임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를 쫓아낼 계획을 세우면서 그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10년 가까이 도피 생활을 한 경력도 있었고 뇌물을 써서 교황이 되었다는 뒷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교황이라기보다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에 가까운 인물이었다율리오 2세가 조금도 손질됨이 없이 정확히 자신의 추한 모습까지 사실대로 그려진 이 초상화를 보고 화를 내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가 라파엘로를 너무도 믿고 사랑해서 그가 하는 그린 것은 뭐든지 다 좋다는 맹목적 사고방식에 잡혀 있었는지 아니면 당시 사람들이 전쟁까지 벌리는 그를 보며 모두 ” 무서운 사람 Terribilis)“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기 이미지 정착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겨 이것을 허락했는지 모른다

 

Pope_Julius_II.jpg

 

       아무튼 교황의 초상화 치곤 너무도 가감없이 그려진 이 초상화는 또 다른 부분에서 그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그의 화려하지 않은 옷과는 무관하게 그의 손에는 6개의 보석 반지가 빈틈없이 박혀 있다이 반지는 그가 전쟁을 하면서까지 얻기로 노력했던 대로마 제국의 군주라는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한마디로 대단한 자기 과시욕에 빠진 교황의 성정을 상징하고 있다.

 

초상화에서 그는 수염을 기르고 있다당시 교황은 수염을 기를 수 없었는데 이것이 또한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그는 교황령을 늘리기 위해 여러 차례 전쟁에 출전했으나 그가 가장 가지고 싶어 했던 전투에서 패함으로 인해서 토지도 얻지 못하고 군인들만 많이 잃자 그는 분기를 이기지 못해 수염을 기르면서 전사한 군인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는 변명을 했는데이 초상화는 교황의 이런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했다.

 

그가 앉은 의자의 기둥은 로베라 가문의 문장인 도토리를 등장시킴으로 그의 가문에 대한 교황의 애정과 집념을 표현하고 있다모든 크리스챤의 지도자인 교황이 자기 가문을 드러내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나 그는 가문의 상승에 대한 대단한 책임감을 느꼈기에 이런 기행도 마지 않았다

 

율리오 2세는 독재자인 동시에 미켈란젤로브라만테 등을 등용한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다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그리고 라파엘로에게 아테네 학당을 그리게 했던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도 율리오 2세다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와 친했던 이유가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나 똑같아서였다니 그들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예술과 학문에 대해 대단한 혜안이 있었고 또 많은 작품을 남겼다그는 베드로 대성당을 위시해서 로마 시내를 장식하기 위해 라파엘로 브라만테 미켈란젤로를 곁에 두고 어떤 때 그들과 대립하면서도 로마를 오늘날처럼 문화와 예술의 차원에서 볼거리가 있는 도시로 만들었다.

 

율리오 2세 교황에 이어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인 레오 10세가 교황이 되면서 교회의 부패는 극에 달하게 되고 급기야는 독일의 말틴 루터의 종교 개혁과 교회안에서는 내부의 부패를 고발한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의 사보랄로나의 출현으로 교회는 큰 진통을 겪으면서 그동안 교회가 쇄신되지 못하고 부패했던 모습에 대한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된다.

 

어느모로 보던 율리오 2세 교황은 교황으로서의 덕행은 가지지 못했으나 그 나름대로 교회에 대한 사람특히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시대 감각이 있었기에 예술과 학문에 있어 많은 공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이것은 교회가 인류의 스승으로서 지녀야 할 품위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신앙은 교리와 신학만으로 표현되면 너무 딱딱하고 지루하기 마련인데 예술과 문화를 통해 표현하면 훨씬 유연하고 인간미가 있게 마런이다.

 

말틴 루터 이전부터 이미 교회의 부패에 저항한 많은 개혁자들이 있었으나 시대의 운을 잘 채우기 못했기에 실패했다그렇나 말틴 루터는 이런 바탕에서 시대 운을 바로 탓기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그는 율리오 교황이 지녔던 인문학적인 지식에 대해선 너무도 무식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도자로서 성서를 가르치면서 살던 루터는 나름대로 경건하게 살던 수도자였다그가 처음으로 로마에 갔을 여느 크리스챤들이나 수도자처럼 순교자들의 피로 이룩된 성도로서의 로마에 대해 대단한 기대를 걸고 갔으나 로마에서 부패한 구위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경악과 실망을 하게 되면서 로마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성직자들은 로마에 가까이 갈수록 더 사악해진다

 

당시 로마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던 성직매매나 대사 판매를 보면서 그는 더할 수 없는 분노와 실망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경건한 루터 였으나 하나의 아쉬움이라면 당시 로마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던 르네상스 문화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한마디로 세상에 변화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와 예술이 대단히 꽃피던 곳이었고 율리오 교황은 바로 이런 바탕을 이해했기에 교회의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무리한 계획이나마 세울 수 있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교회의 토대를 이루게 만들었다.

 

루터가 이태리에 와서 남긴 것은 이런 문화 예술과는 전혀 무관한 독일의 시골 수도자로서 자기가 발견한 새로운 것이었다.

 

열악한 기후의 독일에서 본 것과 다른 것을 발견한 루터의 경의었다그는 로마에 와서 포도가 달고 무화과가 더 크고 맛이 있다는 시골뜨기 수도자의 경탄이 전부였다.

 

율리오 2세 교황은 르네상스 운동의 시작으로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이 커진 당대 사람들을 사로 잡을 수 있는 작품을 남기는 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복음화의 중요한 과제로 여겨 거대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이런 업적에 의해 가톨릭교회가 유럽을 석권할 수 있는 저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의 자기 과시적인 집념과 과대 망상증적인 성정이 신앙으로 표현되었을 때 루터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신앙에 기여할 수 있었다.

 

말틴 루터의 순수한 집념이 신앙으로 승화되면서 좋은 점도 많았지만 예술과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신앙의 표현을 너무 편협하고 광기를 띈 표현으로 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오늘 개신교 신자들이 보이고 있는 세상 문제에 대한 근본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말틴 루터의 로마 체험에서 볼 수 있는 촌스러움과도 직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세모꼴을 동그라미로 표현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 율리오 같은 결점 투성이의 교황을 통해서 하늘의 영광을 세상에 표현했다.

 

교황의 주위에서 긴 세월을 보내고 베드로 대성당에 대단한 작품을 남긴 미켈란젤로는 교황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고 많은 작품을 남기면서도 교황과의 관계가 참으로 불편한 관계에서 애증이 교차되는 관계였다 교황과의 관계는 친구(Amico)와 원수(Nemico)라는 애증관계였다.

 

변덕이 죽끓던 했던 교황이 자기 무덤 제작을 위한 거대한 조각을 부탁해서 카라라 채석장까지가서 많은 대리석을 구해 왔으나 교황이 그 계획을 취소하고 베드로 성당의 새 계획을 구상하자 미켈란젤로는 불같은 분노를 폭발하고 교황을 떠났으나 교황의 강압적 요청에 의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런 일이 겹치면서 그는 교황에 대한 큰 분노와 실망을 느꼈기에 작품에 이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먼저 식스티나 경당의 최후의 심판에서 사도 발톨로메오의 순교 장면에 자기 얼굴을 그려넣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발톨로메오는 살가죽이 벋겨 지는 순교를 당했다고 하는데미켈란젤로는 사도가 들고 있는 가죽에 자기 얼굴을 새겼다교황이 자기 인생을 너무도 착취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대한 반항을 작품을 통해 충격적으로 표현했다.


Last Judgement.jpg

 

       예술가 중에도 명성과 인기에 영합해서 아부를 한 사람이 있으나 미켈란젤로는 영원한 자유인으로서 당시 최고의 권력자이며 더욱이 온 유럽이 무서워 떠는 율리오 교황에게 노골적인 불만과 반항을 했다.

 

어느 종교보다 가톨릭 교회는 장상에 대한 순명을 중요 가치로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직이나 체제의 유지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복음을 왜곡시키기 쉬운데복음적 순종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지 인간 관계에 대한 순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맹종과 아첨을 복음적 순종으로 착각해서 교회를 부끄러운 집단으로 만드는 예를 오늘도 볼 수 있다

 

율리오 교황 편에서 보면 이런 아첨 수준의 순종을 거부하는 미켈란젤로는 참으로 거북스러운 존재였으나 그의 자질을 이해한 교황은 미켈란젤로가 주는 불편을 참음으로써 자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가능한 처지에서 큰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일신의 불편을 참았다는 자체가 그의 덕스러운 표현의 하나라 볼 수도 있으나 미켈란젤로 편에서 보면 교황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원한 원수였기에 교황에 대한 작품을 통한 복수를 했다.


 

Michelangelo,_profeti,_Ezekiel_01.jpg


식스티나 경당의 벽은 최후심판으로 천정은 천지창조로 장식되어 있다천지 창조는 원채 대작인데다 높은 천정에 있으니 망원경을 사용치 않고서는 작품을 정확히 볼 수 없는데오래 동안 촛불이나 연기에 거을려 작은 부분을 보기가 어려웠다가 지난번 전체를 벗기는 복원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즈카리아 예언자의 주위에 있는 천사들의 몸짓이다아기 천사 중 히나가 오늘 우리들에게도 통하는 외설적 몸짓을 손가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현세적인 눈으로 봐도 참으로 외설스런 몸짓을 교황이 미사를 드리면서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기에 오늘까지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좋은 성화를 남길 수 있었고 이런 미켈란젤로가 율리오 2세와 같은 교황을 만나 애증 관계를 이어가면서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걸작을 남길 수 있었다

 

율리오 2세 교황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교화상도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와도 거리가 먼 많은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를 지닌 인간이었으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도구삼아 순수한 열정에 불타는 말틴 루터가 할 수 없었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많은 일을 하셨다

 

성서는 우리에게 원수 사랑을 가르치고 있으며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부담스러움으로 닥아오고 있다

 

율리오 2세 교황의 교황직과 어울리지 않는 여러 성정 속에서도 교회의 존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신앙 표현에 있어 가톨릭 교회의 포용성 깊이 예술을 통해 신앙의 멋스러움과 순수성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교리와 신학으로만 표현되는 종교는 너무 매마르고 신앙이 항상 부담으로 닥아오기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항상 금기 사항을 강조하고 교리 설명의 딱딱한 분위기로 경건한 삶을 강조하기에 신자들은 교회안에서는 긴장된 삶을 살고교회 밖에서 이 긴장을 풀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성공회 주교로 많은 저서를 남긴 리차드 해리스(Richard Harris)는 그리스도교와 예술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교회는 신자들에게 딱딱한 교리와 법으로 묶어둘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고 예술과 문화적 접근으로 신자들이 교회안에서 즐거움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는데율리오 교황은 이런 면에서 괄목한 사목적 접근을 했다

 

교회는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잇는 어머니의 품같은 모습을 율리오 교황은 그가 당대 탁월한 예술가들을 동원해서 제작한 작품들을 통해 표현했다

 

이 초상화를 보면서 우리는 현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중세 교황의 기행을 무조건 숨기거나 합리화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알고 있는 교회의 잘못을 교회안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수치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약점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분이시라는 관점에서 율리오 교황의 기행을 신앙의 차원에서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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