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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드르(Flanders) : 오토 딕스 (Otto Dix, 1891-1969)

by 이종한요한 posted Jun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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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프랑드르(Flanders : 1935)

작   가 :  오토 딕스 (Otto Dix, 1891-1969)

   기 :  200X250cm

소재지 : 독일 베르린 회화 갤러리 



인류 역사에 전쟁이 없었던 시대도 없고, 전쟁이 없었던 나라도 없지만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참으로 긴 세월 동안 많은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반도 국가로서의 중국과 일본이라는 극단의 침략 근성을 가진 나라의 중간에 있었던 이유로 전쟁의 기본인 비참함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처하는 우리 지도자들의 무책임과 무능의 처신으로 인간적인 모욕과 수모까지 감내해야 하는 아픔의 역사가 있었다.


아울러 강대국의 힘 겨루기에 의해 분할된 남북 간의 관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의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남쪽의 부패와 북쪽의 세계 역사상 유래를 보기 힘든 독재가 뒤엉켜 단일 민족 사이라고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북한이 국민들을 굶겨가며, 우리들의 인도적 지원으로 넘겨진 원조 조차, 군비 확장에 빼돌림으로서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을 수 있는 핵 보유국이라는 괴물로 둔갑한 처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남북 대결의 구도가 아닌 온 세상을 전쟁의 공포 속에 몰아넣을 수 있는 화약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런 북한의 지도자가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변신을 함으로서 세계는 새로운 국면에 도달했다.


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변신에 의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 서로 인정하고 사는 남북 관계라는 바램이 많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국민들의 가슴에 정착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시작한 주인공들이 참으로 희한한 존재들이다.


현 세계에서 가장 이상 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미국과 북한의 두  지도자가 바로 전쟁의 종식과 평화 정착을 위한 회답을 시작했다는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있다.


수학에서 (-) x (-) = (+), 즉 플러스가 된다는 이론이 현실 세계에서 가장 괴물 같은 두 지도자에 의해 현실화 되고 있다는 현실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작가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부모의 이해성 있는 협조의 도움으로 독일 문화 도시인 드레스덴(Dresden)미술 학교에 입학해서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 화풍을 학습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그가 포병으로 전쟁에 참가함으로서 그의 예술 경향도 급격히 변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추구하던 부드럽고 여성 취향의 인상파적인 이탈해서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그림으로 고발했다.


이런 현실 고발적인 작품 경향으로 그는 신 즉물주의(Neue Sachikeit) 운동의 주창자가 되었는데, 이 운동은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서 일기 시작한 후 체념과 냉소의 정서를 여과 없이 정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독일이 세계를 제압할 수 있다는 망상으로 시작한 1차 세계대전이 군인들만 약 1000만 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손실이 생기면서, 승리하면 자기들에게 엄청난 이득이 돌아오고 새 세상이 열릴 줄 알았던 독일인들에게는 허탈한 충격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허탈한 분위기는 어두운 과거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게 했으며 작가는 한동안 이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이 작품은 1916년  프랑스의 앙리 바르비스(Henri Barbusse)의 “전쟁” 이라는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영감을 준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작가의 전쟁 체험이었다.


작가는 자기가 겪은 전쟁 체험을 쉼 없이 여과해 이 작품 외에도 전쟁에서 받은 상처로 절름발이가 된 상이군인, 살아남기 위해 참호 속에 들어가 견딘 지옥 같은 체험들  작가는 자기가 겪은 끔찍한 전쟁 체험을 작품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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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기 위해선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어진 전투가 지나간 전쟁터이다. 살해되고 부상당한 사람들의 흔적을 대변하는 것 같은 핏빛의 하늘은 전쟁의 처참함을 알리려는 듯 침울한 상념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


지상에는 전쟁으로 상처받은 인간들이 시체와 부상병의 모습으로 나열해있다. 어디에도 승리의 모습을 볼 수 없는 패배한 군상들의 웅크림이 있다.


인간은 이기기 위해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 생명을 담보로 전쟁을 하지만 남는 것은 패배 뿐 임을 작가는 표현하고 있다. 전장에서 언제나 등장 하기 마련인 승장과 패장의 관계가 여기에서는 없고 모두 패잔병의 모습이다.


이긴 편의 의기 양양함도, 패한 쪽의 기죽은 모습도 볼 수 없이 하나같이 비참한 모습이다. 전쟁에서 이긴 사람들도 인간으로 비참하고 패한 사람도 비참한 모습이다.


중앙에 얼굴을 철모로 가린 수염 난 사나이 옆에 이 비참한 모습의 인간과 전혀 다른 한 소년이 그를 의지해서 죽었는지 잠든 모습으로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철모로 얼굴을 가린 수염 난 사나이는 인생을 살만큼 산 인간이기에 죽음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으나, 이 소년은 생명의 화신과 같은 모습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패배의 비참함과 죽음의 절망이 이 둘의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로 만들고 있다.


그 옆에 어떤 사나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모습으로 쪼그리고 눈을 뜨고 있으나, 그 역시 생명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이들 위에 큰 나무 기둥이 있는데, 포화에 모든 것이 다 잘린 모습으로 전쟁터의 상징과 같은 가시 철망에 감겨져 있고 이 철망에 폭격의 회오리에 날아와 걸린 천 조각이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휘감겨 있다.


이 나무 덩치는 꼭 가시관을 쓰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연상케 하나 여기엔 생명의 희망이 보이지 않기에 갈바리아 언덕의 을씨년스러움으로 지옥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멀리 하늘엔 창백한 달빛에 의해 하늘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데, 오른쪽에는 핏빛으로 대지에 널부러진 시체들을 비추고 있으며 왼쪽 하늘의 회색 구름은 처참한 전투가 있었던 지상엔 승자도 패자의 구분도 없는 완전한 파멸의 패자의 모습임을 알리고 있다.


작가가 이 작품을 구상하던 시기는 독일이 1차 세계 대전에서 챙기지 못한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새롭게 2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던 시기였기에 이 낌새를 확인한 저자는 전쟁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작품을 구상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2차 세계 대전을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러시아와 유럽의 많은 지역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고 미국을 위시해서 아시아에선 일본이 중국과 아시아의 많은 지역을 침공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전 세계를 전쟁의 광기 속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1945년 종전될 때까지 사망자는 5천만이 넘는 참으로 인간의 탐욕이 만든 생지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쟁을 작품으로 고발하면서 작가의 작품 경향은 현실을 냉철히 볼 수 있는 종교적인 경지로 승화 되면서 그의 작품 안에는 다른 작가들이 표현하지 못했던 깊은 종교성을 담게 되었다.


불구로 전역한 퇴역병, 전쟁터에서 군인을 상대한 매춘부, 언제나 전쟁터에서 흔히 생기기 마련인, 성 폭행 피해자들의 비참한 모습이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어떤 종교이던 다 평화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으나, 평화와 반대되는 전쟁에 대한 태도는 너무 다양하며 오늘날에도 놀라운 것은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확산하기 위해 성전(聖戰)을 종교적 신념으로 표현하는 종교가 있으며 이것이 현대 세계의 큰 위험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가톨릭교회 역시 12세기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성전에 대한 과오를 저질렀으며 종교개혁 이후 벌어진 가톨릭과 개신교와의 100년 전쟁은 가톨릭 이전 그리스도교 전반에 걸친 수치스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왕국을 위한 어떤 전쟁도 반대하셨다. 예수님은 어떤 명분으로라도 종교가 전쟁을 하는 것은 당신의 뜻이 아님을 알리셨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만 두어라”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루카 22:50–51)


이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을 방어하시기 위해 어떤  인간적인 폭력도 사용하시기를 거부하실 만큼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 보다 전쟁 자체를 거부하셨다.


승전(勝戰이 목표가 아니라 반전(反戰)이어야 한다는 것을 작가는 자기의 체험을 통해 강조하면서 복음적 가르침과 일치 시키고 있다.


인간들은 승전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만 전쟁은 인간 전체의 모든 것을 다 파괴하기에 전쟁에서 승리를 얻고자 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그의 강렬한 반전 사상을 담은 작품은 호전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던 나치 부대 히틀러의 눈 밖에 나면서 그의 작품은 한 동안 퇴폐 작품으로 낙인찍혀 멸시와 모욕이 되기도 했다.


이런 모든 어려움과 불이익을 감내하고 끝까지 전쟁의 현장에서 익힌  반전(反戰)의 신념을 작품으로 표현한 작가는 전쟁의 공포와 피해 속에 시달린 우리 민족들에게 복음적 반전(反戰)사상이 바로 구원의 길 임을 알리는 나팔수와 같다.


교회는 성서 구절을 인용하면서 위에서 오는 말로 전쟁의 피해를 이야기하기에 전쟁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는 관념적인 사고에 그칠 때가 많다.


그러나 작가는 비참한 전쟁터에서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의 체험에서 전쟁을 이끌어 냄으로 전쟁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전쟁의 실상을 제시해서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이 비참한 전장의 한곳에 서 있는 상념에 빠지게 만든다.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너무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 


승전 (勝戰)의 환상에 빠지지 말아라! 


전쟁은 모두를 파괴해서 패자를 만드는 법이다. 그러기에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선 모두 반전(反戰)론자가 되어야 하며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세상 표현대로 쉽게 전한다.


전쟁은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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