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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의 성모님: 피에트로 로렌제티

by 이종한요한 posted Nov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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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석양의 성모님(Our Lady of sunset) (1306)

  가 : 피에트로 로렌제티 (1280-1348)

  기 : 프레스코 

소재지 : 이태리 아씨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모든 프란치스칸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여기에 사부님의 무덤이 있으며 생전에 사부님과 삶의 모든 것을 나누었던 루피노, 맛세오 ,안젤로 ,레오 형제의 무덤과 함께 사부님의 좋은 여자 친구였던 야고바 형제의 무덤도 있다. 중세기 처지에 여성을 남성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좋은 우정을 나누었단 성 프란치스코의 맑고 넓으며 자유로운 마음이 순례자들의 마음도 시원하게 만들고 있다.


현대 건축가인 아르강은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건축으로서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을 완벽히 표현하고 있다는 칭찬을 주고 있다.


먼저 조직과 권위와는 거리가 먼 형제적 삶을 살고자 하는 프란치스칸들에게 아래층 건물은 사부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확인하는 자리이기에 한마디로 작은 자의 영성을 익히는 곳으로 성인과 제자들의 무덤을 만들어  여기에서 형제들은 프란치스칸 영성을 심화시켜 선교의 도구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느끼게 만들었다.


윗층은 아래와 달리 완전히 개방된 공간으로 프란치스칸 들이 온 세상을 향해 복음을 외쳐야 할 곳임을 알리고 있다. 아래층은 성 프란치스코와 제자들의 무덤이 있기에 당연히 주님의 삶인 부활의 길을 걷기 위해 십자가를 향하는 주님의 수난 사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탄에서 부터 골고타 언덕에서  완성되는 십자가의 수난이 주제로 이어지게 자연스럽게 마음을 경건하면서도 무겁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란 장엄한 주제 아래 놓인 이 작품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무거운 맘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잠시 무겁고 심각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너무 황당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 사도 요한을 보면서 빙그래 미소를 짖게 만들고 있다.


성모자의 양쪽에 성 프란치스코와 사도 요한이 서있다. 사도 요한은 성서에서 가장 순수하면서도 우직하게 주님을 따랐던 제자의 모델이다. 헌데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이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양쪽에 있는 제자들 중 누가 더 마음이 드는지 알려달라고 조르신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를 바라보시면서 엄지 손가락으로 성 프란치스코를 가르치신다. 가정에서도 아기가 자라면서 엄마 아빠 중 누가 더 좋은 지라고 묻는 예가 있는데, 겸손을 강조하는 프란치스칸 들이 자기 창설자를 예수님의 가장 충실한 사도였던 요한과 비긴다는 것은 도를 지나쳐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예사스럽지 않는 일이다. 즉 이 대성당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예수님과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전하는 작품치곤 너무 예외적이며 엉뚱한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도대체 사도 요한과 성 프란치스코를 비긴다는 자체가 너무 황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둘을 비긴다는 자체가 어리석고 황당한 것임이 합당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를 여유롭게 표현하는 좋은 방법인 해학적인 표현으로 보면 된다.


진리는 오직 하나만으로 표현될 수 있기에 진리에 대한 표현만 너무 강조하다보면 진리가 현실 삶에서 너무도 이해가 힘들 뿐 아니라 경직된 것으로 되며 경직된 진리는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 머리가 있는 사람들은 바로 해학적 요소를 도입해서 진리를 표현하곤 했다. 이 때의 해학은 권위나 고압적인 분위기, 세속적인 가치관들을 희극적인 상황 유발을 통해 뒤집는 웃음을 선사한다. 


예수님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심도 있는 해학과 웃음이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너무도 심원히 받아들이다 보면 그분의 진면모를 볼 수 없는데 예수님의 웃음과 해학을 이해했을 때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 진면모를 통합하면서 참으로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도 멋진 분이심을 알게 된다.


그분은 당시 교회 지도층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 소위 바리사이라 불리는 사람들로 부터 엄청난 반대를 당하는 순간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시며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게 만드셨다.


예로 요한 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태도에서 그분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고 하시며 그들에게 충격적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든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은 너무도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위선으로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 하다가 예수님이 자기들의 죄를 고발하는게 아니라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드는 해학의 가치에 눈뜨면서 바리사이들은 모두 사라지게 만들면서 새로운 질서를 찾게 만들었다.


바리사이들이 다 떠난 후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너를 단죄하던 사람은 다 어디에 갔느냐 물으시자 그 여인은 이무도 없습니다 주님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그리고 다시 죄 짖지 말라.”는 말씀으로 그 여인에게 다시 생명을 되돌려 주셨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을 위한 대성당이기에 예수님과 예수님을 가장 닮은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아래층은 예수님의 기억으로 가득 채우고 윗 층은 온 세상에 프란치스코를 전하기 위한 선교 파견지로서 계획을 했기에 너무도 진실과 확증에만 몰입하다보면 대성당은 평화의 공간이 아닌 긴장과 갈등이 가득 찬 공간이 될 위험이 있었다.


작가는 바로 이런 아쉬움을 메우기 위해  복음의 핵심적 인물들을 해학적인 관점에 배치함으로서 전체 공간이 복음적 생기와 삶의 여유로 가득찬 곳으로 변모시켰다.


아씨시 대성당을 순례하는 순례자들은 너무도 복음적인 내용이 많은데 숨을 죽이며 순례하다가 예수님의 수난도 아래 있는 이 작품을 보면서 복음이 주는 신선한 기쁨으로 자신을 충전하게 만들었다.


교황 성 요한 23세께서는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웃음이 포함되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자신이 쓰러지면서 이웃 사람을 자라게 하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해학의 힘이다. 복음적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숨통을 틔우는 이 작품은 진리를 찾는 삶은 긴장되는 것이 아닌 삶의 여유와 해학으로 영근 삶임을 알리고 있다.


이 작품은 아씨시 대성당이 담고 있는 수많은 보물 중에서 프란치스칸 영성의 여유와 멋스러움을 알리는 보석과 같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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