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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대천사와 성모 마리아의 미소

by 이종한요한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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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가브리엘 대천사와 성모 마리아의 미소

작품연도 : 13세기 (1245)

소 재 지  : 프랑스 랭스 대성당


성 미술을 통해 여러 아름다운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번 소개하는 작품과 관계되는 것이다. 우리 교민으로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로 고딕 건축에 대한 대단한 관심을 가진 분이 계신다. 그래서 그 바쁜 일정에도 시간이 생기면 고딕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를 방문하시면서 가히 독학의 처지에서 어느 전문가 못지 않는 수준에 이르게 되셨다.


몇 년 전 우연히 고국을 방문하시는 길에 그분이 자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고딕 건축을 고국에 소개하려는 열망을 성 미술을 하고 있는 본인을 통해 표시하시기에 도와드리자 이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두절되었던 처지에 며칠 전 이 작품을 액자에 넣어 선물로 보내 주셨다. 이심전심이라는 표현대로 그분이 지닌 고딕 예술에 대한 감수성과 본인의 기대가 맞아 떨어진 것이라 여겨 예수님의 성탄의 시작과 같은 이 작품을 여기에 소개한다.


이 작품은 본인 또한 무척 소중히 여기는 것이기에 약 10년 전 “천사의 미소”라는 제목으로 이 홈페이지에 소개한 바 있으나 예수님의 성탄은 바로 성모영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시작되었기에 이 작품은 성탄 의미 확인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내용을 보완 심화해서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있는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인들이 자존심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다. 역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을 하던 곳이며 프랑스가 영국과 전쟁의 어려움에 있을 때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의 혼이 깃든 도시라 프랑스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이 대성당은 여느 고딕 성당처럼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외하고도 성당 안밖을 성서의 내용으로 장식한 조각이 2000여 점 있는데 이 작품은 외부 북쪽 벽에 있는 조각으로 성탄의 전반부인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루카복음 1장 26-38절의 내용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 신앙에서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인간 마리아를 통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오신 구세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매일 세 번의 삼종기도를 통해 이것을 반추하는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다


◎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뢰니 ● 성령으로 잉태하셨도다.

◎ 주님의 종이 오니 ●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삼종기도 첫 소절)


마리아를 찾아온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은 항상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았기에 그에겐 언제나 희망과 기쁨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람다운 기품 있는 미소를 보이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전령과 같은 위압감이 전혀 없는 온화한 모습이다.


이 천사의 미소를 교회 미술에선 크리스챤 미소의 모델처럼 여기며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다.


하느님의 속성인 전능과 위엄과 같은 것과는 전혀 거리가 있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따스한 모습의 미소로 천사의 모습만이 아니라 이 천사의 미소를 통해 하느님이 우리를 향한 신앙적 차원의 사랑 표현이 얼마나 자연적인 것임을 알리고 있기에 신앙의 차원을 떠나서도 많은 선의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신학이 표현하기 어려웠던 하느님의 중요한 속성,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훈훈함을 작가는 이 천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을 너무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려다 보면 하느님은 정확한 엄격함으로 일관된 분으로 드러나기 쉬운 아쉬운 면을 예술은 너무도 잘 보완하고 있다.


하느님의 미소라는 것은 우리에게 그리 친근하지 않는 생소한 개념이다. 창세기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항상 흐뭇해하셨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으나 이것은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을 강조하는 교회 신학에 짓눌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구약 창세기는 하느님의 창조 설화에서 하느님이 창조의 결과가 흐뭇함으로 다가 왔다고 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좋은 것이 다 좋았다.” (창세 1,31)


그런데 불교에서도 부처님의 미소를 확인할 수 있다. 석굴암 본존불 부처님의 미소 뿐 아니라 부처님이 생전 생노병사의 인생사에 고뇌하시면서 출가를 결심하기 전의 모습을 조각한 그 유명한 반가 사유상에서도 고뇌의 순간에 보이는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다.


지금 용산 국립 미술관에는 우리나라와 일본 반가 사유상이 특별 전시되고 있는데 부처님의 미소를 확인하는데 좋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본인은 여기에서 두 종교 예술 작품에 드러나는 미소의 우열을 제시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으로 족한 것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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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천사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행복의 시작임을 표시하는 미소를 보이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의 고귀한 모습을 미소로 표현하고 있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며 자기가 전하는 것 즉 나자렛 출신의 마리아가 구세주의 어머니로 간택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대견하기에 인간의 시각으로 가난하고 비천한 존재인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미소로 표현되고 있다.


천사의 미소 안에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에겐 항상 좋은 일이 이루어진다는 신앙 안에 깊은 신뢰가 담겨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서로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가브리엘 천사는 기품 있는 미소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을 확인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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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비해 마리아의 미소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먼저 마리아는 천사의 수려하고 세련된 용모와 다른 어딘지 모를 순박함을 넘은 촌스러움을 풍기고 있는데 이것은 마리아의 태생적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사명을 듣기 전에 그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처녀에 불과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은 성모님께 온갖 아름다운 칭호를 사용하다 못해 여왕이라는 칭호도 사용하고 있으나 그분은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자기가 결정할 권리가 아무것도 없는 약자의 신분인 처녀에 불과했다.


우리는 성모님의 호칭인 동정녀를 성적인 순결과 신비로운 신분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당시 동정녀라는 것은 결혼하지 않는 처녀에 대한 일반적 호칭에 불과했으며 성모님의 동정성은 결코 성적인 순결로 묶는 것은 아주 편협한 사고방식이며 이것은 결혼의 성사성을 폄하할 위험까지 있다.


성모님의 동정성이 위대함은 성적인 관계와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던지 신앙으로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성에 있다.


복음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전달이 하느님의 뜻인 줄 알았을 때 성모님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인 하느님을 향한 극도의 신뢰가 바로 동정의 핵심이다.


성모님을 일생을 사고도 많이 치는 아들 뒤를 뒷바라지하시면서 당신 아들 예수님이 하느님의 신성을 처음 드러내는 가나 촌의 혼인 잔치에선 잔치 준비하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강경한 태도로 예수님을 도우면서 그분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항상 곁을 지키는 동반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외로운 죽음을 맞으실 때 그 곁을 지키신 분도 성모님이시고, 부활의 순간과 그분의 승천 후 불안에 떠는 제자들을 모아 다락방에서 기도하시며 새로 시작되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도 성모님이시고 이 모든 것이 성모님 동정성의 표현이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아끼지 않는 개방성이 바로 동정이지 신체적 성적인 순결이 동정이 아니시다. 또한 성모님은 출신도 변변치 않는 시골뜨기 처녀에 불과했다.


나자렛은 오늘도 이스라엘 한촌에 있는 후진 마을에 불과한데, 성모님 당시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마을이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첫 설교를 했을 때 군중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출생지가 나자렛이라는 것 때문에 그분을 비웃고 멸시할 지경이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천사의 미소와 성모님의 미소는 이런 관점에서 전혀 다른 것이기에 많은 작품에서 성모님이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성모님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충격이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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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보다 약 2세기 후에 제작된 이태리 작가의 작품에는 성모님의 놀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천사나 성모님이 서로 다른 처지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미소로 표현하고 있다.


이 미소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자신의 앞길이 하느님의 인도를 받게 된다는 극단의 평화와 안정된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모님을 본받는 다는 것은 바로 이런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어떤 순간 흔히 요즘 많이 말하는 불확실한 삶의 정황에서도 결단이 망설여지는 순간이나 불안한 순간에도 성모님의 마음으로 여유 속에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태도를 말한다.


하느님을 향한 극단의 신뢰 때문에 삶의 불안한 순간이 미소로 응답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을 수 있고 또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고귀함과 멋스러움을 보일 수 있다.


동방 정교회 수도원에는 성모영보를 주제로 한 그림이나 조각을 수도원 건물의 입구에 두는 전통이 있다.


이것은 수도자란 성모님처럼 매일 새롭게 천사를 통해 들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신뢰의 삶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란 뜻인데, 이런 태도는 수도자만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해당되는 크리스챤다운 덕스러움의 멋진 표현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대성당에 와서 천사의 미소를 보고 대단한 감동을 느끼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삶의 원초적 감동의 표현이다.


그러나 성서적 신앙이 있는 크리스챤들, 성모님의 근본을 알고 있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가브리엘 천사의 미소 못지않게 어눌스럽고 촌스럽게 표현된 성모님의 미소를 통해 우리 가톨릭 신앙의 본질 표현에 성모님의 존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이것은 또한 상업성으로 들뜨기 쉬운 성탄 분위기의 정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여기 성모님의 미소를 보는 가톨릭 신자들은 성서가 성모님의 삶을 통해 보인 고귀하면서도 멋스러운 신앙의 내용에 감동을 느끼며, 어떤 명강론 못지않게 성모님의 존재성이 신앙의 승화에 도움이 되는 지를 발견하면서 이 땅에 일부 무지한 개신교 신자들의 왜곡된 성모관을 비방의 차원이 아니라 가련한 차원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하신 다음 말씀을 성모님을 무지와 편견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기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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