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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심판 :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by 이종한요한 posted Apr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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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최후 심판(1499-1502)

  가 :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41-1523)

소재지 : 이태리 오르비에토 대성당 내 브리지오(Brizio) 경당

  기 : 프레스코


중세기에 접어 들면서 이태리 사회는
  불안한 사회현실 때문에 최후심판이 도래했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단일 국가 형태가 아닌 도시국가의 형태였던 이태리는 이권 다툼을 위한 도시간에 여러 전쟁이 잦았고 외부로 부터의 적의 침략 역시 만만 찮았기에 편한 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이 퍼지면서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겹친데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 가장 힘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부패하면서 교회에 대한 실망과 무지하고 탐욕적인 성직자들의 횡포는
  자연스럽게 성서에 나타나는 최후심판 교리를 부정적인 방향의 말세 심판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당시 흉흉하던 민심을 바른 종말론의 제시로 잡고, 특별히 하느님을 삶의 지표로 삼으며 살아야 한다는 건전한 신앙 태도와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는 호교적護敎的 목표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예술적 표현의 강한 시사성이 있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분위기에서 신자들에게 신뢰를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던 중 당시 수준의 신자들을 마음을 되잡을 수 있는 사건이 생겼다.


체코 출신의 베드로라는 사제가 로마 순례를 가던 차 이태리 북쪽 볼세냐라는 곳에 도착해서 미사를 드리던 중 기적이 일어났다. 베드로 사제가 드리던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축성 중 포도주가 성혈로 변해 깔아두었던 성체포를 적신 것이다.


성체 축성 기도를 마치자 말자 축성된 면병으로부터 피가 흐르기 시작하여 신부의 손가락들을 적시고, 제대와 성체포(聖體布) 위로 흘러내렸다.


신부는 몹시 당황하였다. 처음에는 피를 감추려고 했으나, 곧 그는 미사를 중단하고, 마침 교황 우르바노 4세께서 머물고 계시던 이웃 도시 오르비에또(Orvieto)로 인도해 달라고 하였다.


당시 이곳은 교황의 여름 별장이 있던 적들의 침입을 막기 좋은 전형적 성곽 도시였다. 베드로 신부의 증언을 들은 교황은 즉시 이 기적의 진위를 조사한 후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 교구의 주교에게 그 성체와 피 묻은 성체포를 오르비에또로 모셔오도록 명하셨다.


주님의 성혈이 묻은 이 성체포는 오늘도 이 대성당 안에 정중하게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 기적의 현장을 확인하지 않는 처지이나 이 성체포의 혈흔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 이 성체포의 혈흔은 많이 사라져서 약간 희미한 모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조작을 위해서라면 혈흔이 선명하게 만들었을 텐데 그렇지 않고 희미한 것이 바로 진실의 증거이다. 인간의 피는 몇 백년을 꼭 같은 색깔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이 이 성체포 진위성의 좋은 증거이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곧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에게 성체를 공경하는 기도문을 짓도록 명하셨으며 이 기도문은 오늘까지도 교회가 사용하고 있다. 이 기적을 기념하는 것이 교회가 정한 주님의 성체 성혈 축일이며 유럽에서는 민속적 차원에서도 꽃길을 만드는 등 아름다운 축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 기적의 소문이 온 유럽으로 퍼지면서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게 되자 교회는 이 순례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을 계획하게 된다.


오늘도 그렇듯 이런 순례 성당은 순례자들에게 신앙의 심화를 목표로 한 한마디로 시각적 피정 장소처럼 성서적 내용을 그 시대에 맞게 감동적으로 전달하는 맛 깔진 시각의 장소가 되며
  그 시대가 앞에 열거한 여러 사정으로 참으로 신자들의 신앙을 각성하는 계가가 될 수 있도록 최후심판에 대한 주제의 작품을 남기기로 하고 적임자로 작가를 선정했다.


작가인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는 당시 일기 시작한 르네상스 예술의 경향에 감동하여 인간 육체를 하느님의 작품성 중 가장 고귀하고 탁월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해부학 공부를 통해 인간 육체를 통해 드러나는 과거 상상도 못할 과감한 표현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성화를 제작했다.


그전 시기까지 인간 육체는 죄의 근원이요 위험한 것이란 사고방식의 팽배로
  교회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작가는 당시 일기 시작한 그리스 철학과 조각의 가치성을 수용해서 교회가 첨단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개방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는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묵시문학의 종말 장면을 연작으로 표현했는데,


<적그리스도의 행적들>, <죽은 이들의 부활>,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인데 이것은 <죽음>과 <심판>, <천국>과 <지옥>을 다룬 사말 교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혁신적인 원근법과 나체화로 묘사된 세상의 종말 장면은 전통적인 화법에서 느낄 수 있는 을씨년스러운 공포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체험이라는 밝은 관점으로 이끌기에 그 당시 관람자들에게 매우 독창적이고 극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작품의 시작을 알리는 <적그리스도의 행적들>은 성경에 나오는 종말의 징표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적’(Antichristus)이란 표현은 사도 요한의 서간에 나온다.(1요한 2,18.22; 4,3; 2요한 7)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1요한 2:18) “속이는 사람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2요한 7)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악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적’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큰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종교 사기꾼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차마 종교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런 사기꾼들의 말이나 글에 수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고 있는 오늘 우리의 종교 현실은 바로 묵시록의 저자가 한탄하면서
  경고한 종교의 말세 현상이니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좋은 교훈이다.


오늘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래를 보기 힘든 기독교 계통의 종교 부흥 현상은 안타깝게도 묵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적 그리스도의 모습과 너무 유사하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사회의 종교 현상 안에 이런 말세 현상이 너무도 두드러지게 표현되기에 이 작가의 고발이 중세기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산 교훈을 준다고 볼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스스로 예수님을 사칭하며 실재는 우매한 사람들에게 사기꾼처럼 자기 욕심의 성취를 예수의 가르침인양 교묘히 왜곡시켜 사람들에게 복음이란 이름의 독소를 퍼트리고 있다. 그들이 떠들고 많은 우매한 광신자들이 열광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예수를 팔아먹는 거짓이다. 그가 가르치는 복음은 영원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 삶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것부터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의 고통 속에서 어떤 교회 집단이 코로나 확신의 진원지 역할을 해서 국민을 불안과 실망에 빠트리고 있는 가운데서도 거기 성직자라는 사람이 교회 코로나 문제를 간섭하는 것은 종교 탄압이라고 하고 여기에 동조하는 광신도들의 만만찮은 무리들이 댓글을 달고 있는 게 오늘 우리의 수치스러운 종교 현상이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서 그를 조종하는 것은 사탄이라는 것을 작가는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최후 심판을 항상 큰 두려움의 원천으로 과장하면서 자기를 믿고 헌금을 해야 이런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협박을 하고 있으며 이런 교주나 사기꾼 성직자들의 속임수에 빠진 광신도나 맹신도가 만드는 혼란이 바로 오늘 우리 사회의 종교 현실이기도 하기에 이 작품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너무 실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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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몸은 해부학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묘사되었고, 사탄의 피부 빛을 검게 혹은 검푸른 시체빛 색으로 과장하여 악마를 더욱 실감나고 소름끼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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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중에 눈에 뛰는 사람이 있는데, 적그리스도의 오른 쪽 중앙에 있는 금발의 처녀로 그녀는 몸을 돌려 돈 많은 노인에게 돈을 요구하고 있고, 돈 많은 노인은 전대에서 돈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고 있다. 이것은 세상의 종말에 몸을 파는 행위가 성행함을 암시한다. 즉 욕망이 판매의 대상이 되면서 세상은 더 없이 피폐해지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 불교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탱화에서 드러나는 지옥도의 성격을 나체로 표현했다는 것이 특징이며 이 나체의 표현을 통해 악의 실세를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지옥의 모습은 승천하는 사람들처럼 다 헐벗고 있는 사람들과 천사 그리고 악마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는데, 죄를 지은 사람들을 벌하는 악마의 피부색이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등의 원색을 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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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사기꾼이나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을씨년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으나 설득력 있게 정리한 후 최후심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보이는 육신의 부활 모습을 통하여 신앙 안에서 승리와 부활한 생명의 모습을 생기 있게 전하고 있다. 마치 겨울의 을씨년스러움이 끝나고 시작된 봄의 기쁨을 찬미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잘못된 종말론을 퍼트리는 사이비 종교인들의 추악한 잘못을 지적한 후 크리스챤으로서 희망과 기쁨을 확인받을 수 있는 영원한 고향인 천국과 여기에 이르기 전 인간이 거치게 되는 육신 부활의 밝은 면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의로운 영혼들이 육신부활의 영광을 겪은 후 천국으로 올라가는 승리한 크리스챤들의 환희를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에스겔서 37장 초반부에 보면, 죽은 자들의 백골에 살을 입히고 영을 불어넣어 하늘로 인도해줄 것을 약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통념적으로 최후심판을 멸망으로 알아듣는 습관이 있고 종교 사기꾼들은 의도적으로 심판을 멸망과 연관시키면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어 자기 교단에 묶어두려는 묘책을 쓰고 있으나 성서는 이와 전혀 다르며 작가 역시 성서가 말하고 있는 희망적인 관점을 작품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작가에게 이 작품이 맡겨지던 시절이야 말로 참으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말세가 생각나는 서글프고 내일에 대한 공포를 느끼던 시대였으나 작가는 과감하게도 이런 경계를 뛰어넘어 성서가 가르치는 희망의 미래 죽음이 아닌 생명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이것은 역시 르네상스 예술의 영향으로 인간의 육신성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선한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작가는 구약성서 에제키엘 서에 나타나고 있는 육신 부활의 희망적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에제키엘 서 37장엔 마지막 부활 죽었던 해골들이 일어나면서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어 소생하는 것을 바로 최후 심판으로 이어지는 부활한 인간 새로운 생명의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는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러 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너희에게 힘줄을 주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래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3–6) 


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은 죽은 해골과 같은 처지의 이스라엘 인들을 하느님의 영으로 다시 살려 새로운 생명으로 살게 하겠다는 것이 바로 약속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최후심판의 마지막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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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우리가 사도신경 안에서도 고백하신 육신의 부활교리는 너무도 생기 있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표현했다. 최후심판의 소식이 선포되면서 무덤이 열리고 죽은 사람들이 동면을 깬 생물들처럼 다시 깨어나게 된다. 친구의 도움으로 무덤에서 나온 부활한 존재들은 너무도 밝고 생기롭다. 살아생전에 상상을 못했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모습으로 너무 자연스럽고 당당히 서 있다.


그 옆에 서 있는 해골들 역시 표정이 예사스럽지 않다. 죽음의 처절한 상징이 아닌 앙상한 그들의 해골에도 부활한 친구들처럼 생명이 넘칠 날을 보기에 해골이 줄 수 있는 죽음과 공포의 상징이 아닌 마치 봄이 오면 고목나무에 움트는 새싹이나 꽃처럼 상쾌하다.


육신 부활의 바른 의미를 나체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고 심원한 사랑은 흙과 같은 인간 육신에게도 엄청난 사랑의 표현이 드러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 흙같은 육신도 마지막 날에 제 가치를 확인하게 해 주신다.


성서의 이런 희망적 약속이 인간들의 옹골한 마음으로 너무나 어둡고 부정적인 것으로 전해지는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하면서 작가는 르네상스 작가의 대범한 나체의 표현으로 해골의 죽음에서 무덤에서 일어나는 부활한 영혼이 보이는 생명의 모습을 너무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국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 인물들과는 대조적으로,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우측, 백골 상태의 뼈들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 마냥 역동적인 모습으로 자신들에게도 살이 덧입혀지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는데, 뼈밖에 없는 해골이지만, 그들의 표정이나 감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비록 벌거벗은 처지에서도 위풍당당하게 주님을 기다리는 선배들의 뒷모습을 보며 내심 부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한 이들의 모습은 비록 해골이지만 생명이 깃들이고 있는 밝은 모습이다.


즉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성체 기적을 확인하기 위해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진면모 즉 복음이 가르치는 희망의 삶 생명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죽음으로 심판 받음으로 끝날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멋진 인생을 보장받은 존재임을 제시하고 있다.


하늘에 구름이 끼고 폭우가 내리고 난 후 하늘은 더 맑아지며 상쾌해지는 것처럼 주님 최후심판은 결코 을씨년스러운 파괴가 아닌 새로운 부활의 모습으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즉 최후 심판에 이어지는 새로운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의 이 작품은 성체 기적을 통한 신앙의 확인을 위해 모인 순례자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작가가 살던 시대의 육체란 죄와 유혹의 근원이기에 가급적 피해야 할 것으로 여기던 사회에 나체를 통해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움의 진면모와 인간 미래의 희망적인 모습을 제시했다는 것은 대단한 예언이었다.

작가는 최후심판을 말세 현상으로 공포를 주던 시대에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시체실을 드나들며 해부를 통해 인간 신체를 정확히 묘사하는 법을 배웠다.


당시 사회와 교회의 폐쇄적인 태도는 시체 해부를 범죄로 생각해서 엄격히 금했으나 예언적 사고방식에 눈뜬 작가는 인간 나체의 묘사를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당시 사람들에게 필요한 질병과 공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신앙의 멋스러움을 제시했다.


작가의 이 작품은 후대 미켈란젤로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작가 보다 30년 후에 활동을 시작한 미켈란젤로는 작가의 작품에 깊은 감동을 받아 그 여기 해부학을 공부하면서
  자기 작품에 도입했고 그의 걸작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나체의 군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전적인 작가의 영향이었다.


성 미술이란 신앙의 내용을 그 시대 정서에 맞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정확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하지 시대를 통해 눈에 익은 고색창연한 것이 되어선 않된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생경스러운 나체가 성당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그 시대 정서에 맞게 표현했다는 면에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신앙 표현의 새로운 면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종교이든 사이비는 항상 있을 수 있으나 가톨릭 신자로서 가슴 아픈 것은 오늘 우리 주위에 크리스찬 종파 중에 종교 사기꾼들이 너무 세상을 소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사기꾼들을 추종하고 맹종하는 우매한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참으로 귀한 교훈을 줄 수 있다.


500여년 전 시대에 그려진 이 작품을 보면 가톨릭 신앙이 소위 떠드는 구교가 아니라 참으로 참신하면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종교임을 알게 된다. 신앙의 내용은 불변이지만 이것의 표현은 시대를 따라 적절히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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