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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노죠 고죨리 - 삼왕의 경배

by 관리형제 posted Dec 3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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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삼왕의 경배
작가: 베노죠 고죨리( Benozzo Gozzoli :1421- 1497)
소재지 : 이태리 피렌체 리카르디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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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문화권이나 시대에도 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존경을 받은 명문대가(名文大家)가 있으나, 서부 유럽에서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문에 속한다.

원래 이 가문은 농민 출신이었으나 교황청의 재정 관리를 맡아 보면서 교황청의 환심을 얻게 되어 교황청 소유였던 백반 광산의 채굴권을 따냄으로서 피렌체의 직물업에 뛰어들게 되어 대단한 부를 비축하게 되었다. 백반은 당시 직물 염색에 필수품이었기에 메디치 가문은 유럽의 거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금융업자, 피렌체 공국의 지도자로서 피렌체를 예술과 학문의 수준에서 유럽 굴지의 도시로 만드는데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늘어나는 재산을 바탕삼아 그들은 유럽 사회에 정치, 경제적인 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인문학의 발달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투자를 하면서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가 되어 피렌체를 베네치아와 쌍벽을 이루는 르네상스의 도시로 만들었다.

이들은 일개 가문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력은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왕실과 맞먹는 대단한 저력을 확보하면서 유럽 전체에 르네상스의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부자들에게 있을 수 있는 과시욕으로 예술과 학문을 후원한 것이 아니라, 동방으로부터 유입되는 새로운 학문과 예술의 경지에 접하면서 대단한 교양을 쌓을 수 있었고 그러기에 시대를 앞서 사는 선각자로서 사명감을 느꼈기에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키울 수 있었으며 이들의 노력에 의해 피렌체는 유럽 르네상스 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 가문을 실질적으로 일으킨 코시모 디 베키오 (Cosimo di Vecchio :1389- 1464)는 한때 반대파의 힘에 밀려 추방을 당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재치 있는 처신으로 정권에 복귀하면서 사재를 아낌없이 피렌체 시청에 투자해서 오늘의 아름다움을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해서 국부(Pater Patrie)의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인 피에로 델 메디치(1416-1469)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피렌체 시에 더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메디치 가문을 명실공이 유럽 사회의 귀족 가문으로 정착시켰다,

1442년 교황 마르틴 5세는 메디치 가문의 궁전에 개인 경당을 설치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 이것은 메디치 집안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대단한 특전이었기에 당시 유명세를 떨치던 작가에게 내부 장식을 위임하여 15세기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진 프레스코화를 제작케 했다.

작가는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주제를 세 벽면에 배치하여 서로 다른 왕의 행렬을 배치하고 각 행렬의 마지막을 천장의 정간(井間)에 있는 시에나의 성베르나르도의 작품인 예수 성명의 상징인 JHS 의 모노그램에 모이도록 했다.

마태오 복음의 2장에 나타나고 있는 이 내용은 동방의 세 박사가 별의 인도로 예루살렘을 찾아 왔다가 주님이 계신 베들레헴으로 가서 경배했다는 내용이며 전승에서 세 박사의 이름이 가스팔, 멜키올, 발타살로 되어 있으나, 작가는 엉뚱한 착상으로 젊은 박사, 중년의 박사, 노인 박사라는 기발한 착상으로 성서의 내용을 통해 메디치 집안의 영광을 표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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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작가는 메디치 가문의 요청에 따라 성서에 나타나는 동방박사의 사건을 복음적 시각에서 보다 자기들의 처지에서 짜깁기해서 메디치 가문을 통한 피렌체의 융성을 찬미하는 의도의 작품을 구상했기에 젊은 왕의 행렬이 가장 먼저 등장하며 , 산꼭대기에 있는 작은 성채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이 성채는 피렌체 근교인 가바고지올로에 있던, 메디치 가문의 별장이었다.

여기에서 작가는 성서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다시 베들레헴을 찾는 것처럼, 메디치 가문의 별장을 예루살렘에 비유해서 여기에서 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위상을 한껏 격상시키고 있다. 즉 당시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예루살렘에 비겨 과시하고 있다.

말을 타고 있는 젊은이는 피에로의 아들 로렌죠(Loreano del Medici:1419- 1492)인데, 그는 메디치 가문의 영광을 극상으로 끌어올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한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인문주의자로서 르네상스의 도시로서 피렌체의 성격 정립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메디치 은행의 돈을 유럽 여러 나라에 대부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며, 당시 메디치 은행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유럽의 여러 왕들이 이 은행의 대부가 없이는 전쟁을 치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행정관으로서 독재의 성격으로 다스리면서도 사육제, 마상경기, 무도회들을 자주 열어 독재 사회에 있을 수 있는 경직성을 제거할 만큼 삶의 여유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시를 지을 만한 문인이면서도 대단한 예술적 안목이 있어 레오나르드 다빈치를 초대하고, 15살의 미켈란젤로가 지닌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집에 불러 들여 키울 만큼 예술과 학문에 대해 대단한 투자를 했다.

그러나 주변 강대국의 횡포와 침략을 피할 수 있는 노련한 외교로 정치를 하다가 교황 식스토 4세의 미움을 받아 암살의 위기를 겪게 된다. 경쟁 가문인 빠지 가문과의 불화에 교황이 개입함으로서 부활절 미사에 자객들을 동원해서 로렌죠를 살해코자 했으나 요행히 그는 피하면서 동생 쥴리오룰 잃게 된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의 침착하고 지혜로운 처신으로 국민들의 호응 속에 정적들을 제거함으로서 피렌체 공국에 대한 자신의 입지를 더 키우게 된다. 그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과도한 투자는 재정에 부담이 되기도 했으나 그는 기꺼이 꾸준히 도움을 베풀었다. 로렌죠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학문 예술의 분야 뿐 아니라 이태리 정치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10세 미만의 소년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의 모자에 있는 보석들, 말에 달린 장신구들은 어린 소년의 행렬에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것으로서, 작가는 메디치 가문의 영광이 로렌죠를 통해 초승달처럼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어린 소년에게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장중한 장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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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메디치 가문을 통해 드러나는 피렌체의 영광을 그리기 위해 초상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을 그 시대인물을 모델로 그리고 있으며 특히, 자신의 초상화도 대범하게 새겼다. 당시 피렌체에서 한다한 사람들이 다 등장하는 이 행렬에 그는 대담하게 자신의 모습을 새겼다.

중앙에 붉은 모자를 쓴 채 무심한 눈빛으로 관객을 바라보는 이가 바로 작가인데. 그의 모자에는 BENOTI라는 서명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의 영광을 탁월하게 그릴 수 있는 자신의 자신감을 숨김없이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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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여기에서 엉뚱하게도 당시 있었던 피렌체 공의회에 있었던 사건을 재현하면서 메디치 집안의 공적을 재현하고 있다. 1439년 페라라에서 열리고 있던 공의회가 피에로의 아버지 코시모에 의해 피렌체로 유치되어 이어지게 된다.

당시 페라라는 치안이 불안했을 뿐 아니라, 경비 조달이 힘든 처지 였는데, 코시모가 이 둘의 부담을 다 안고 초대함으로서 교회 안에서의 위치도 격상되었다.

피렌체 공의회는 분열되었던 동서방 교회의 일치라는 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
로마의 주교인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알력은 힘겨루기의 양상이었으나 성화상 논쟁 등 여러 핑계로 팽팽히 대립되다가 상호 파문으로 갈라지게 된다. 동방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플이 새로 일어나는 터키의 무슬림들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자, 동로마제국 시민들은 살기 위한 자구책으로 자존심을 꺾고 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시도하게 된다.

서방교회는 여러 면에서 우위에 있던 처지라 조금 도움을 베풀면서 허약한 교회를 흡수할 수 있다는 이익적 차원에서 응하게 되었는데, 이때 동로마 황제인 요한 5세도 참가하게 된다.

대단한 문화와 부를 자랑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나 패색이 분명한 왕조를 지키기 위해 서로 원수처럼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서방교회를 믿음 안에 형제로 부르면서도움을 청하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하고 공의회에 참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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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구걸을 위해 오긴 했으나 그는 역시 황제이니, 어색하게나마 더 위엄과 기품을 갖추어야 하기에 백마를 감싸고 있는 주위 5명의 시종들의 복장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늠름하며 황제가 타고 있는 백마 역시 동로마 황제 권위의 상징인 늠름한 백마이나 힘겨움의 그늘이 드리워진 모습이다.

황제가 쓰고 있는 관은 공작새가 위에 있는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으로서 서 로마제국보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더 풍부했던 동 로마 제국인 비잔틴 제국의 영화를 표현하고 있다.




황제의 뒤에 말을 탄 세 명의 젊은 시종이 따르고 있다. 이들은 놀랍게도 작품의 주문인인 피에르의 딸들인데 , 남자의 복장으로 등장하고 있다.

농사꾼 집안으로서 좋은 운과 노력의 결과로 유럽의 명문으로 부상하게 된 메디치 가문으로서는 자기들의 힘으로 공의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것이 집안의 대단한 경사요 후세에 길이 남기고 싶은 일이었기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 가족들을 등장시키고 싶어 여기에 관객으로서는 좀 이상하지만 딸들까지 등장시켰다.

젊은 박사 부분에 아들을 등장시킨 작가는 여기에 딸들을 등장시킴으로서 메디치 가문이야 말로 공의회를 개최한 역사의 주인공임을 강하게 부각시키고자 했다.




가장 화려하고 수행원이 많은 행렬로서 말을 탄 가장 고령인 박사는 반대편에서 오는 젊은 왕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이 늙은 박사는 당시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던 동로마 제국의 총대주교이니, 서방교회 수준에선 교황과 같은 서열의 고위 성직자이다.

하늘같은 자존심으로 몇 백년을 버티어 왔지만 새로 일어나는 유목민인 무슬림 군대가 성벽 가까이에서 전투 준비를 하면서 숨통을 죄는 처지에 있으니, 과거의 불쾌감이나 자존심을 다 포기하고 형제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하기 위해 황제를 동반하고 참석한 처지이다. 종교 회의에 정교(政敎)의 으뜸인 황제와 총대주교가 나란히 참석한 것을 보면 당시동방교회의 위기감이 얼마나 절박했던 가를 짐작할 수 있다.




총대주교는 회색의 긴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이것은 동방의 상징이다. 당시 서방에서는 수염을 기르지 않고 모두 말끔히 면도하고 있던 시대였는데, 총대주교의 수염과 그윽한 표정은 지도자의 위엄과 동방적인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종교와 정치가 일치하던 시대였고, 국민들이 바로 신자들이니 그는 목자로서 위기에 있는 신자요,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대단한 시도를 한 셈이다. 그의 표정에 하느님을 향한 의탁에서 오는 침착함과 함께 회색빛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의회를 통해 주어질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의혹의 눈길을 보이고 있다.

번거로운 신학 논쟁도 동방으로서는 더 이상 고집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자연스럽게 양보와 수용의 태도를 취함으로서 7월 16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통합이 장엄하게 선포되고 두 교회 지도자들은 서로 우호의 포옹을 나누었고 동 로마의 요한 황제는 로마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서약함으로서 형식적인 일치가 이루어졌다.




동쪽에서 새로 일어나는 무슬림들을 막기에는 너무 힘겨워 신앙의 이름으로 굴욕을 감수하고 많은 것을 양보한 동방교회 지도자들이, 회담 결과를 들고 콘스탄티노플로 귀국했을 때 국내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비등하고 있었다.

자기들만이 전통임을 굳게 믿고 있던 동 로마 시민들은 오만 것과 다 타협하는 서방교회의 교황 앞에 자기 황제가 무릎을 꿇고 서방 교회에 종속되기로 결정한 행위는 자존심에 대단한 상처를 주는 것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공의회 결정을 없던 것으로 하고 자기들의 정통성을 지키며 살자는 것으로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당시의 정서는 교황 아래 굴복하기보다 차라리 무슬림에게 굴복하고 노예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참으로 슬픈 정서였다. 결국 동로마제국은 1453년 수도를 포위한 14만명의 터키에 맞서서 2개월을 버티다 함락되고 많은 시민들이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의 법통은 러시아가 맡게 되었다.

이런 슬픈 역사를 암시나 하듯 총대주교의 행렬은 무척 길면서도 언덕을 올라야 하기에 힘겨운 모습이다. 높은 곳을 오르고 있는 많은 짐승들의 등에는 하나같이 무거운 짐들이 매어져 있다. 회담의 성공이란 목표를 향해 힘겨운 여행을 하고 있는 동방교회가 가져온 짐들은 회담을 부드럽게 성사시키는데 필요한 뇌물일 수도 있고, 비록 망하는 처지에서나마 자신들의 자존심을 과시할 수 있는 서방보다 훨씬 앞서가던 동방 문화의 보물일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이 장면의 힘겨운 인상은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을 팔아야 하는 힘없는 사람들의 슬픈 모습으로 아련히 다가오게 된다. 작가는 “동방 박사의 경배”라는 성서의 내용을 자기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여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공국의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했기에 거룩한 것을 너무 세속화시킨 것 같은 불쾌하고 황당한 인상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메디치 가문 만큼 역사에서 빛과 어둠의 양면으로 조명을 받는 집안이 없으며, 작가가 메디치 가문의 밝은 면을 한껏 조명했듯, 역사에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라는 인류 공동의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

1737년 기인과 폐인의 삶으로 주위 사람들을 경악케 했던 대공(大公) 쟝 가스토네를 마지막으로 메디치 집안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지금도 피렌체 중심부는 코시모가 살던 때와 기본 틀이 거의 같다. 초록과 흰색 검은색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장엄한 아름다운 돔은 지금도 변함없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 앞 성 요한 세례당에는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 1455)가 만든 “천국의 문”앞에 관람객들이 줄서서 넋을 잃고 성서의 내용들을 음미하고 있다.

여기서 조금 아르노 강 쪽으로 걸어 나오면 메디치 집안의 사무실로 쓰이던 곳이 메디치의 가보들을 보관한 미술관이 되어 있는데, 그 이름도 사무실이라는 뜻의 우피치(Galleria degli Uffizi)로서 관람객들을 맞아들이고 있으며, 추운 겨울을 제외하곤 관람객들의 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과 함께 메디치 가문의 역사는 “빛은 어둠 보다 더 강하고 아름답다.”는 긍정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리카르디 경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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