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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리버만 : 식사 기도를 바치는 오스트프리슬랜드(Ostfriesland) 농부들 [1890]

by 이종한요한 posted Jun 0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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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식사 기도를 바치는 오스트프리슬랜드(Ostfriesland)농부들[1890]

작 가 : 막스 리버만 (Max Liebermann: 1847 - 1935)

크 기 : 캠퍼스 유채: 93 X 120cm

소재지 : 독일 함브르크 시립 미술관

전체본.jpg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 작가는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 아름다운 전원 및 여유로운 삶의 생활 풍경 등을 그려, 이것이 인정을 받자 상류 사회의 생활 정경과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독일 미술계와 상류 사회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작가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게 되고, 생활환경이 인정받던 계층에서 질시 받는 요주의 인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급격한 충격을 겪으면서 작가는 인생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고 , 말년에 와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일하는 모습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작품을 통해 투사하며 발전시켰다.

 

   작가는 프랑스 인상파 작가들이 추구했던 인생의 밝고 안정된 면과는 달리 어둡고 불안정한 삶의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생의 고귀함과 훈기를 표현함으로서 인상파 화풍의 새로운 경지를 열게 되었다.

 

   이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오스트프리슬랜드는 오늘은 폴란드에 속하는 독일의 북동부 지방이다.

 

  독일과 국경을 사이에 둔 이 지방은 항상 독일과 폴란드의 전쟁터였고, 두 나라에 번갈아 지배받는 지역이 되었다. 2차 대전 전에는 나치의 침략으로 독일 영토였다가 전쟁 후 현재는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두 세력의 각축장이 되다보니, 자연히 살만한 사람들은 다 떠나게 되고 오갈 데 없이 힘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변했다.

 

   두 나라 역시 언제 또 빼앗길지 모를 지역이라는 생각에 큰 관심을 쓰지 않다보니 자연스럽게 원시적인 농업에 의존하는 낙후된 지역으로 변했다.

    

  작가는 이 작품 안에서 열악하기 이전 너무도 비참한 이곳 주민들의 삶에서도 굳건한 신앙으로 살아가기에 어느 부유층이나 안정된 처지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훈훈하면서 인간다운 고귀한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jpg


  이 지역 농부의 집으로 보이는 헛간처럼 지저분하고 휑하게 보이는 공간에 두 쌍의 부부가 식탁에 앉아 있다.

 

   풍성한 소출을 거둘 수 있는 윤택한 농가와는 거리가 먼 목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 집의 인상을 주는 그런 서글프고 초라한 농가이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식탁엔 삶은 감자를 담은 흰 접시 하나가 휑하게 놓여 있다. 식탁은 인간 삶의 기본, 즉 음식을 통한 육신의 생기와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와의 만남 안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갈 활력을 충전할 수 있는 곳이기에 안락한 분위기가 기본이어야 한다.

 

   헌데 이들이 앉은 식탁은 그런 것과 전혀 거리가 먼 서글픈 인상을 주는 곳이다. 균형이 전혀 없는 의자에 둘러싸인 식탁이나, 어디 하나 안정성이 보이지 않는 그런 불균형의 모습은 이들이 살아가는 불안한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오른쪽에 이 집의 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다. 하루에 힘겨운 노동을 마친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하루 종일 신었던 신발 조차 벗어 놓고 탈진한 것 같은 인상으로 앉은 그의 모습은 하루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고달픈 하루를 보낸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기처럼 고달픈 하루를 보낸 아내와 친구 부부와 식탁에 놓인 감자 한 접시가 전부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도 비참한 처지의 안쓰러운 모습이지만 이들은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 이 기도는 식사 전에 치루는 습관적 형식이나 관례가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경건한 인간 삶의 본질적 표현이다.

 

   열심히 기도한다기보다 자기의 존재 전체를 다 바쳐 기도하는 모습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수도원에서 바치는 수도자의 기도와 또 다른 인간 실존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감동적인 숭엄한 기도의 모습이다.


빛.jpg


   이들의 암담한 삶의 현실을 반영이나 하듯이 식당의 분위기는 화사함이나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잿빛의 어둠으로 덮여 있어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의 암담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뚫린 문을 통해 찬란한 햇살이 눈부신 외부가 보인다. 암담한 실내와는 전혀 다른 빛의 세계이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인간 사회에서 이들은 경쟁에서 낙후된 존재들이나, 누구 못지않게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지키고 있다는 희망의 상징으로서의 빛이다.

 

   지금의 현실은 암담하지만 언젠가 하느님께서 이들 삶에 개입하셔서 삶을 기쁨으로 바꾸리라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 조그만 문을 통해 보이는 빛은 시편의 다음 구절을 연상시킨다.

 

  “하느님은 우리의 힘, 우리의 피난처, 어려운 고비마다 항상 구해 주셨으니, 땅이 흔들려도 산들이 깊은 바다로 빠져들어도, 우리는 무서워 아니하리라.” (시편 46,1-2)

 

   비록 식탁에 한 접시 감자를 두고 둘러앉은 이들이지만 하느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이 있기에, 역설적으로 하느님 밖에 의지할 곳이 없기에, 어떤 안정을 누리는 인간들보다 오히려 더 흔들리지 않는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본 -가난한 사람들.jpg


   농부들은 감자 한 접시를 앞에 두고 경건한 기도를 바친다. 이 기도는 크리스챤들의 대표 기도인 주의 기도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바치는 기도는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가 아니다.

 

   감자 한 접시의 식탁이 너무 초라하니,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하소연하면서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한숨 섞인 기도나 더 풍성한 식탁에 앉게 해달라는 기도도 아니다.

 

   비록 최소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양식이나 자기들이 땀 흘려 거둔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알고 감사하는 기도인데, 이것은 사제가 미사 중 성찬기도의 양식으로 바치는 다음 기도문을 연상시킨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저희가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가꾸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작가는 많은 인상주의 작가들이 구사했던 아름다운 자연이나 꽃을 통해서가 아니라 열악한 삶의 현실에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믿기에 세상의 풍요가 줄 수 없는 그런 풍요를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으로 관람자들을 초대함으로서 신앙이 줄 수 있는 격조 높은 행복한 삶의 실상을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이 그렸던 여유 있는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름기 흐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비록 인간적으로는 암담한 처지에 있지만 하느님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보이고 있는 행복한 삶의 또 다른 실상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의 행복은 믿을 교리처럼 무조건 받아 들여야 할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처지에서건 이 식탁에 앉은 농부들처럼 세상이 주는 행복과 또 다른 의미의 현실적이고 가능한 행복을 말한다.

 

   이 작품 배경과 다른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 작품은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세상의 불균등은 갈수록 더 심각해지면서 세상은 이 작품의 배경처럼 변화하고 있다.

 

   경제 상위 그룹의 1%애 속하는 사람들이 세상 부의 50%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 간격은 갈수록 더 심화되고 있다.

 

   작가는 인생의 상위그룹에 속하는 안정된 배경에서 바라보던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을 기득권을 상실하면서 발견하게 되고,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적인 안정성이 없는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이 주는 위안과 희망을 제시했다는데 이 작품은 현대에도 감동적인 작품이다.

 

   소득향상이 곧 인간 행복의 기본이 될 수 없고,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인간 삶의 최선이 될 수도 없으며, 이것 못지않게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인생의 현실을 볼 수 있을 때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어느 성인의 말은 이 작품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성서는 세상 가르침과 전혀 반대되는 역설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것이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루카 6:20)

 

   이것은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척도로서는 불행의 근원과 같은 가난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가난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신앙의 못자리가 될 수 있기에, 이 세상 부요한 사람들이 줄 수 있는 행복과 비길 수 없는 차원 높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행복이 역사의 어떤 순간에 세상으로부터 멸시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향상 보다 일방적인 신앙만을 강조함으로서, 가난한 사람이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이 바로 종교이며 그러기에 종교는 아편이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것은 오늘에도 크리스챤들이 깊이 새기며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 농부들이 보이고 있는 기도하는 모습은 비록 종교가 자기 역할을 못해 아편처럼 인간 발전을 막는 걸림돌도 될 수 있지만, 신앙 안에서는 이 세상 어떤 것들도 줄 수 없는 큰 위안과 희망이 있음을 작가는 이 작품 안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감자 한 접시 앞에 기도하는 두 쌍의 농부들은,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행복의 참모습을 전하고 있다. 세상 속을 살아가야 하기에 착심하지 않으면 세파에 휘말려 잊기 쉬운 주님이 말씀하신 참 행복의 뒷모습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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