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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 성가정(1645)

by 이종한요한 posted Dec 2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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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정1.jpg

제 목 : 성가정(1645)

작 가 :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크 기 : 캠퍼스 유채 :117 x 91cm

소재지 :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에레미타쥬 미술관

 

해바라기로 상징되는 현대인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고 있는 화란의 작가 반 코흐(Vincent van Gogh : 1853- 1890)는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진정한 종교화의 경지를 발견하여 감동을 받았기에 그의 작품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이 그림 앞에서 보름 동안 마른 빵 부스러기만 먹으며 앉아 있을 수 있다면 내 삶의 십년도 기꺼이 바치겠다.”

 

렘브란트는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대단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로 상당한 부를 축척하고 있던 화란의 상류사회 인사들이 그에게 자화상을 부탁하기 위해 줄을 서면서 그는 명성과 부를 동시에 얻기 시작했다.

 

이런 행운 속에서 방앗간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귀족의 딸이었던 사스키아와 결혼하면서 파격적인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다. 아내는 평민 출신인 남편을 아무런 격의 없이 사랑하면서 격조 높은 귀족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극진한 내조를 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작품에 극명히 나타나고 있는 빛과 그림자의 대조처럼 극명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의 첫 번째 불행은 그의 아내가 젊은 나이에 어린 아들을 두고 갑자기 죽은 것이었다. 셋이나 자식을 잃고 뒤늦게 얻어 큰 기대를 걸었단 아들 티투스마저 잃으면서 그는 불행의 수렁으로 빠지기 시작했고 후반기에 그는 외적으로도 몰락했다.

 

졸지에 홀아비가 된 처지의 작가에게 헨드리키에라는 농부의 딸이 등장하면서 그의 인생은 바뀌게 된다. 그녀는 렘브란트를 온갖 지성을 다해 돌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아들 티투스의 양어머니로서도 최선을 다함으로서 렘브란트의 생활에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끝없이 닥쳤다. 작가는 돈에 대한 판단력이 없었기에, 분에 넘치는 돈을 낭비하다가 불명예스러운 파산선고를 당하게 되고, 급기야는 그가 살던 집을 내놓고, 가족은 친척집에 자신은 싸구려 여인숙에 기식해야 할 만큼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여기에 겹쳐 자기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형편없는 여자와 동거생활을 한다는 것이 청교도 사회에서 고발될 만큼 그는 사고뭉치의 처지가 되었다.

작가가 겪은 삶은 이처럼 항상 어두웠기에 이런 삶에서 탈출을 갈망하는 그에게 항상 빛이 그리움으로 다가왔기에 그의 작품에서 빛과 어둠은 극단적으로 대립되면서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쳐 그를 빛의 마술사라고 불리게 만들었다.

 

덴마크 출신의 철학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 1813- 1855)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는데, 이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불운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작가의 여정을 너무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삶이 외적으로 거부당하고 밑으로 내려 갈 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위로 올라간다.”

 

작가의 작품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빛은 어둠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는 위력을 힘차게 상징하고 있다. 고통과 실패하는 암흑 한가운데 비치는 신앙의 빛이 지닌 힘 때문에 그의 작품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 12)

 

그는 자신의 약점 때문에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 속에서 영적인 빛을 보았다. 이 영적인 빛이 발하는 빛줄기가 없었다면 그의 삶은 온전히 견디어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빛”(요한 1:5) 으로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명백한 표징이었다. 그는 온갖 추악하고 비참한 경험을 했으면서도 인간을 하느님의 빛 안에서 밝고 희망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성탄을 표현할 때 보통 말구유부터 시작하는 게 통례이며, 오늘 많은 성탄화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으나, 사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요셉과 마리아를 부모 삼아 인간 가정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기에, 교회는 이 모습을 바로 성가정이라는 것으로 표현하며 모든 크리스챤 가정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먼저 요셉의 작업장인 목공소를 배경으로 전개하고 있다. 예수님의 인간 삶에의 동참은 말구유라는 임시 거처가 아니라 아버지 요셉의 작업장이었던 목공소였음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들이 팔을 벌려 성가정을 축복하고 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선물인 빛을 성모님을 통해 아기 예수님께로 보내고 있다.

이 천사들은 성서의 다른 곳에 나타나고 있는 어른스런 모습이 아닌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하는 퓨티(Putti)라는 아기 모습의 천사이다. 그들의 시선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하느님의 아들 아기 예수님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께 시선을 향하고 있다. 요셉의 오른 손 끝자락에 마리아가 있다.

 요셉.jpg


천사의 날개 끝자락에 요셉이 있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감싸고 있는 빛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어둠속에서 아내와 자식을 응시하는 가장의 모습으로 서있다.

 

그는 성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서 벽에는 목공에 사용되는 연장들이 걸려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일하는 요셉의 얼굴을 비추는 작은 빛이 연장들까지 비추고 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간과하기 쉬운 노동의 크리스챤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기계 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노동의 가치를 망각하게 만들면서 물량적인 이익이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것 같은 암시를 끊임없이 주고 있다.

 

요즘 인기 연예인이나 주식 투자를 잘 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을 할 수 없는 돈을 모우면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메스컴에서 빠질 수 없는 양념으로 등장하고 있는 그들이 만드는 스캔들이나 패션은 사람들이 얼마나 이들의 삶을 동경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소수의 의식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무의식 속에서나마 대중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요셉의 삶은 현대인의 이런 허상을 고발하면서 삶의 가치와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우고 있다

 

이는 자신의 노고로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있는 노동하는 모습이 진실한 행복임을 전하고 있다

 

 마리아.jpg


남편 요셉의 목공소에서 아들 예수를 담은 광우리 옆에 앉아 성서를 보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은 성화로 보기 힘들 정도로 소박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표현하고 있다. 경제가 나아지면서 붕괴되고 있는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작가는 성모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익숙한 후광을 두른 천상의 여인이 아니라 바로 당시 암스텔담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주부로 등장시켰다.

남편의 항구한 외조 덕분에 어려움 없이 착실히 살고 있는 행복한 주부의 모습이다.

 

그는 아기가 자는 동안 성서를 보다가 잠시 눈을 잠자는 아들에게 돌리며 보살피고 있다

 

아기는 광우리에 담겨 있는데, 이것은 아기 예수의 존재성이 구약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모세의 예표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길렀다. 그러나 더 숨겨 둘 수가 없게 되자, 왕골 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탈출기 2:1- 3)


다른 한 손으로는 아기의 눈에 빛을 가리기 위해 담요를 덥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모델은 아들 하나를 두고 상처해 홀아비가 된 작가의 내조자인 헨드리키에와 아들 티투스이다. 여기에 작가의 신앙관이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 교회처럼 성모 잉태를 강조하는 처지에서 정식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생활을 하는 여인을 성모님의 모델로 한다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까지 여겨질 수 있으나, 작가의 신앙은 전혀 달랐다.

 

그는 성서를 일상적인 삶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진부한 삶의 현실을 성서의 영원으로 끌어올렸다.

 

자식 하나 덜렁 남은 홀아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며 살아가는 헨드리키에의 모습에서 그는 성모님의 모성을 발견한 것이다. 성모님과 같은 깊은 신앙이 없었다면 도저히 자기 부자의 곁을 지킬 수 없다는 그의 신앙이 이런 설정을 하게 되었다.

 

작가는 복음을 외골수로 살기로 소문난 개신교 교파인 메노나이트 신자라기도 하고, 화란의 주종이었던 칼빈파에 속한다고도 하지만 그의 삶은 그것과 다르면서도 그 이상의 삶에 있었다.


그는 성서 중심적인 인생관은 모든 종파를 초월해 크리스챤이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작가는 일생을 성경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많은 책을 통하여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성서의 빛으로만 받아 들였다.


가난하게 살다가 고독하게 죽은 이 예술가가 남긴 몇 안 되는 소유물 가운데 성경 한권이 있었다. 그는 영혼의 고통 때문에 그가 빠져 있던 어둠을 그저 견뎌 내기만이라도 하려고 성서를 가까이 했다.


이런 면에서 작가의 작품은 전통적인 작가인 엘 그레고(El Greco)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와는 다른 면으로 복음의 강한 열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표현한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어둔 면을 직시했던 작가의 생활체험에서 영근 것이었다. 가톨릭과 개신교 지도자들과 군주들이 자기 세력 확보를 위해 일으킨 종교전쟁의 모델인 삼십년 전쟁”(1618- 1648)을 보면서 편협한 종교의 광기가 얼마나 추악하고 잔인한 것인지를 체험했다.

 

그래서 어떤 종파의 교리에 사로잡힌 편협한 종교인이 되는 게 열심히 아니라 오직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제자로서 혁명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여겨 성모님의 모델을 파격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고, 이런 작가의 신앙은 모든 교리와 신조에서 해방된 신비주의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작가의 이런 신앙관은 종교 예술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경지를 열게 되었으며, 이것이 반 코흐를 열광시키며 작품에도 엄청남 영향을 주게 되었다.

 

작가는 신성(神性)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깊은 곳에 들어있는 속성(俗性)도 볼 줄 알았다. 그의 신앙의 특징은 신성과 속성을 이분화 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 두 영역을 연결시키는 데 있었다.


그의 예술의 새로움은 신성과 속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 모든 신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이며, 모든 인간적인 것이야 말로 바로 신적인 것임을 명확히 드러내었다.


성가정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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